[이택환] 선 줄로 생각하는 자에게
[이택환] 선 줄로 생각하는 자에게
  • 이택환
  • 승인 2019.03.25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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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고전 10:1-14

오늘 서신서 본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주는 사도 바울의 경고입니다. “악한 일을 즐겨하지 말라”(6), “음행하지 말라”(8),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9),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10), 많은 경고가 있지만, 결국은 한 가지, 모두 14절의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자신이 우상 숭배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스스로 “굳건히 서 있다!”고 자만하는 자들에게 경고합니다(12).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안에서 스스로 선 자로 착각했던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만 가지고는 그 맥락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고전 8장부터 10장까지 연결된 이야기 속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는 한편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궁금해 하는 중요한 주제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혼과 독신, 성령의 은사, 부활 등에 대한 바울의 주옥같은 답변이 고린도전서에 제시되어 있지요. 같은 방식으로 고전 8장부터 9장, 10장에 걸쳐 우상의 제물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이라는 주제가 민감한 사안이 된 이유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때 사도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 것을 요청했지요. 하지만 고린도와 같이 온갖 신들을 숭배하는 도시에서는, 식용 고기 대부분이 이미 수많은 신전의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이 문제가 마치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의 영원한 문제, 즉 그리스도인이 술을 마셔도 되는가, 안 되는가와 같은 난제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는 우상의 제물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일군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첫째, 지식(그노시스)의 힘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으로서 드물게, 세상에는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지식을 소유했습니다. 우상이 더 이상 의미가 없으므로, 무슨 음식이든 담대히 먹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바울도 100% 동의합니다. 칭찬받을 일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이들이 그런 지식이 없는 성도들을 조롱하고 무시한 것이지요. 바울은 그처럼 공동체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지식은 교만에 불과하다고 일갈합니다.

이들이 스스로 선자라고 생각한 두 번째 이유는 그들에게 마땅히 무엇이든 먹고 마실 자유(엑수시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개인적일지라도 신앙인의 삶은 공적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운 권리 사용이 혹시라도 믿음 약한 자들을 실족케 하는 행위가 된다면, 그것은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바울의 가르침 이전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마 18:6. 막 9:43, 눅 17:2).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자신의 예를 듭니다(9장).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자비량선교를 했지요. 그 점이 바울을 탁월한 전도자가 되게 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져야할 짐이 너무나 컸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 사례비를 받을 자격이 없어서. 자비량으로 일했다는 인식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사례비를 많이 받는 목사일수록 교계에서 훌륭하고 유능한 목사로 대접받습니다. 반대로 사례비가 적어 다른 일을 해야만 하는 목사, 특별히 전문직이 아닌 육체노동을 하는 목사는 쉽게 무시당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으로 본 사도로서, 로마법이나 모세율법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볼 때에도, 마땅히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사례를 받지 않았던 이유는 이방지역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9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지요.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마땅히 사용할 수 있었던 자신의 권리(엑수시아)를 그렇게 기꺼이 제한했던 것입니다.

그 길은 바울이 예수님을 닮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언젠가 같은 노회의 존경하는 한 은퇴목사님이 제게 물으셨습니다. “그동안 내가 지켜본 바로, 이 목사님은 큰 교회 담임 목사로 가실 자격이 충분히 있는데, 왜 작은 개척교회 목회자가 되었습니까?” 제가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아닙니다.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저를 불러주는 교회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교회를 개척한 겁니다.” 100% 그런 건 아니지만, 100% 아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저는 가고 싶어도 못가는 유수한 큰 교회에서 얼마든지 편안하게 신앙생활하실 수 있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굳이 작은 교회에 나와 힘들고 불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오늘날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제한하여, 작은 교회를 선택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 그들은 어떤 면에서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그렇다고 큰 교회 목사님이나 성도 분들이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 스스로 선자라고 여기는 자들이 생긴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거룩한 성찬식에 참여하는 한, 자신이 우상숭배에 빠질 일이 없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례와 성찬의 신비한 능력을 힘입기만 하면, 시장에서 우상의 제물을 사 먹어도, 우상숭배자들의 집에 초대받아 그들과 같이 그 음식을 먹어도, 심지어 우상 신전 축제에 참가해서 함께 먹고 마시고 놀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오늘 고린도전서 10장 본문이 바로 이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1-4절,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이야기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은 세례와 성찬에 견줄만한 역사적 사례입니다. 세례와 유사한 구원 사건의 예가 옛 이스라엘이 홍해바다를 건널 때, 애굽 바로 왕으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건입니다. 또 성찬과 유사한 예는 당시 이스라엘이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날마다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그곳에서,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솟아나는 샘물을 마신 사건입니다. 어쩌면 이 사건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세례 받고 성찬식에 참석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깊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바울이 6절부터 10절까지 경고하는 것, 즉 “악한 일을 즐겨하지 말라”(6), “음행하지 말라”(8),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9),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10), 모두 14절의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는 경고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많은 이스라엘이 왜 광야에서 그렇게 기이한 죽음을 맞이했는가, 그들이 도대체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그런 천벌을 받았는가,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도 예수님이, 예루살렘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명이 사람들의 죄가 다른 예루살렘 사람들보 더 많아서 죽은 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꾸 죽은 사람의 죄에 초점을 맞추려는 것은, 마치 지난 3월 15일 뉴질랜드에서 50명의 테러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을 두고, 이슬람 사원에서 예배하다 사망한 사람들이 과연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리도 끔찍하게 죽었는가를 묻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입니다. 정작 그리스도인이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은 그보다, 교회가 어떻게 그들 희생자 유가족을 도울 것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뉴질랜드의 곳곳에서 수많은 교회가 보복테러를 당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도, 용감하게 증오를 용납하지 말자는 메시지가 적힌 녹색 하트 스티커를 가슴에 붙이고, 추모자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하지요. 감사한 일입니다.

바울이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한 것은, 스스로 선 자로 여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깨우치기 위한 본보기였습니다(11). “우리에게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을 충분한 지식이 있다! 우리에겐 우상숭배자 친구들과도 교제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더구나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매주 신비한 성찬예식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상 신전 축제에 참가해서 먹고 마시고 뛰놀지라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장담할 게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하다가는 언제든지 한 순간에 훅 가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12절,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식(그노시스)도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하고, 우리의 자유과 권리(엑수시아)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으며, 기독교 성례인 세례와 성찬마저도 우상의 유혹 앞에서 신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 특별히 오늘날의 우상은 옛날 고린도 중앙 아고라 광장에 가득한 디오니소스, 아르테미스, 포세이돈, 아폴론,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제우스의 동상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돈과 권력과 성으로 강력하게 우리를 유혹하는 맘몬입니다. 그 강력한 맘몬의 유혹 앞에 내로라하는 유력한 인물들이 날마다 꼬꾸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에겐 미쁘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13절,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미쁘신, 즉 신실하신(피스토스)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광야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에도, 놋뱀을 허락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 길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놋뱀처럼 십자가 위헤 높이 들린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세상의 온갖 시험과 유혹(페이라조)에 수시로 넘어질 때에도, 벗어날 길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 교회의 신비한 성례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참으로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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