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내게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책
[김영웅의책과일상] 내게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책
  • 김영웅
  • 승인 2019.03.2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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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 스토너, 알에이치코리아, 2015년
존 윌리엄스, 스토너, 알에이치코리아, 2015년

새로운 작가의 글, 처음 만나는 세상, 가슴 설레는 기쁨. 하지만 이런 것들도 잠시. 어느새 난 책 속에 빠져들어 책의 일부가 된다. 더 이상 가슴 설레는 구경꾼이 아닌, 그 세상의 일부가 된다. 내겐 낯설기만 한 시공간,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세상에선 나만 이방인이다. 그곳에서 난 바라보고 듣고 느끼는 일 이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난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외적인 사건과 내적인 의식의 흐름까지도 파악해가는 유일한 자리를 꿰찬다. 그렇게 난 그 낯선 세상에서 어느덧 신적인 이방인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기꺼이 또 다른 한 권의 책의 독자가 되어 또 다른 낯선 세상을 여행했다. 오늘 오후에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모든 세상이 다르듯 모든 여행은 다른 느낌을 선물해 주지만, 이번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기분은, 음 뭐랄까. 조용한 절망감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느낌 속에는 예기치 않게 묘하도록 깊이 공감했던 나 자신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여 내 인생도 주인공의 인생과 똑같이 조용히 절망스럽다고 해야 할까 봐, 내 인생도 그렇게 고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까 봐, 어쩌면 난 그렇게 내심 두려웠했던 건 아니었을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비록 내겐 짧은 시간이지만, 덕분에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잔에 가득하게 따랐던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심지어 입도 대지 못한 채 빠져들어가며 읽었던 책이다. 책을 약 삼분의 일 정도 읽었을 즈음 깨달았다. 이 소설은 분명 내게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아직도 멍하니 어두워진 창 밖을 바라볼 때면 스토너가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나와 함께 조용한 절망 위에 앉아있는 듯하다.

책을 통해 그의 인생을 관조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은 정말이지 고독했고 절망적일 정도로 조용했다. 하지만 정작 스토너 자신은 죽는 순간까지 절망에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충분히 절망적일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는 끝까지 선을 넘지 않는, 바보스러울만큼 부드럽고 순응적인 자세를 보여줬고 제어된 열정을 조용히 간직한 채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분열되었던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회복되지 못한 채로, 유일하게 영혼의 사랑을 나누었던 캐서린과의 재회도 없이, 그리고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던 로맥스에게 제대로 한 방도 먹이지 못한 채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그가 침대에 누운 채 가까스로 들었던 자신의 저서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밤의 적막을 가르며 바닥에 떨어지던 그 순간. 그의 마지막 순간. 아.. 인생이란 이런 걸까 싶었다. 평범함의 옷을 입고 있어 비록 아무런 티가 나지 않지만, 그의 인생은 분열과 고독으로 점철된 슬픈 삶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특정한 목적도 없이 투박한 인생을 시작했지만, 우연찮게 대학이란 곳에 들어가게 되어 영문학이란 낯선 영역에서 자아의 눈을 뜨게 되는 여정과, 부모님이 바랐던 농부의 미래 대신 영문학을 전공하여 나중엔 그것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살아가는 여정이 소설의 도입부를 이룬다. 그리고 성격장애 기질이 농후한 아내를 만나 죽기까지 지속되었던, 조용한 지옥과도 같았던 분열된 결혼생활, 아내에게 느껴야 했을 공감 충만한 영혼의 사랑을 다른 여자에게서 느끼며 억제된 본능이 표출되었던 그의 슬픈 외도와 아픈 이별, 또한 열등감과 오만함으로 거침없이 발현된 교만함을 고급스럽게 외교적으로 포장하여 스토너의 영혼을 죽는 날까지 쪼아대며 갉아먹었던 동료 교수의 횡포 등의 굵직한 내용이 소설의 중간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서 스토너는 그가 가졌던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 이외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병들고 쇠약해진 모습, 급기야 암을 진단받고 외로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참 고독했다. 그렇다. 내가 이 책에서 묵직한 울림을 느끼며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고독’이었다.

나이 마흔을 넘기며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한 나에게 이 책은 아주 묘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내가 인생의 낮은 곳을 지나보지 않았더라면, 결혼생활을 수년간 해보지 않았더라면, 결혼생활에서 아내와 다투고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았더라면, 직장생활에서 능수능란하지만 사악하게 외교적인 악질을 만나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이 책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표면에 드러난 사건들과 그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를지라도, 그 본질에 녹아있는 분열과 고독,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그것들을 그대로 안고 결국은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 인간의 무섭고도 놀라운 적응력, 그 어긋난 각도를 가진 삶의 모습은 아마도 모든 사람, 아니 적어도 인생의 내리막길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스토너의 인생은 곧 우리의 인생에 다름 아닌 것이다. 평범한 삶이란 영점 조정이 되어 아무런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진공 속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평범한 삶이란 분열과 고독을 머금은 채 슬픔을 안고 어긋난 각도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함께 하는 이의 사랑과 공감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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