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사랑: 파괴된 관계에 구원이 임하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사랑: 파괴된 관계에 구원이 임하다.
  • 김영웅
  • 승인 2019.03.2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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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찌는 듯이 무더운 7월의 어느 날 해질 무렵,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이미 수십 번이나 머리 속에서 계획했던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사전 답사를 가는 길이다. 대상은 전당포 주인이자 고리대금업자였던 한 노파였고, 살인 도구는 도끼가 될 예정이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감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가난했다. 돈이 없어 다니던 대학도 휴학했다. 그가 사는 숨막힐 듯 작은 방은 이미 월세가 많이 밀려 있다. 잘 먹지도 못해 건강도 나쁜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사전 답사 다음 날, 때마침 배달된 어머니의 편지에서 그는 여동생이 돈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할 예정이라는 소식까지 듣게 된다. 그는 여동생이 자신에게 돈을 부쳐주기 위해 일부러 희생하려 한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고, 즉시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마음이 들었다. 분노가 치솟았다. 모든 게 돈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사전 답사를 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살인을 망설이고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나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살인은 반드시 실행에 옮겨져야 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고독한 이상주의자이자 몽상가였다. 주위와 단절된 채 관 같은 작은 방에 틀어박혀 생각만 해댄 지 벌써 한 달째였다. 그가 가진 해괴망측한 사상은 자신을 포함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단번에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였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돈을 많이 가진 극소수의 이 (lice) 같은 인간들을 제거하여 그들이 가졌던 많은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어설프게 산술적인 공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인간의 본성 (특히 양심의 존재)을 깊이 고려하지 못한 심각한 오류에 불과했다. 이론적으로 아무런 결함이 없더라도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순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살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인간에게도 살인은 허용되지 않는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은 여기서 또 한 번 큰 오류를 범한다. 살인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을 범인과 비범인 (초인)으로 나누는 이론을 믿기 시작한다. 살인을 하기 위해선 범인이 아닌 비범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 같은 극소수의 사람만 해당되는 비범인.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범인들에겐 모든 것이 허용되며, 심지어 사람을 죽여도 죄를 짓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는 묻는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 영웅이 된 자들이 과연 죄인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칭송 받지 않았던가? 그의 생각이 만약 여기에서만이라도 멈춰줬더라면 아마도 살인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자신이 비범인에 속할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모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참으로 불행하게도, 그는 이를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계획했던 대로 살인을 저지른다. 운이 잘 따라주어 살인 현장에 이르기까지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계획했던 도끼를 구할 수 없어 잠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지만, 신기하게도 아주 우연찮게 다른 도끼를 손쉽게 획득할 수 있었다. 참으로 기막힌 순간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운명인 것만 같았다. 자신이 비범인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는 한 사람을 더 죽여야만 했다. 예정에도 없었던 그 무고한 희생자의 이름은 리자베따, 전당포 주인의 여동생이었다. 분명 그녀는 그 시간에 다른 곳에 있어야 했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라스꼴리니꼬프는 노파를 죽이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언제나 우연을 끌고 들어오는 법. 그녀의 약속이 바뀌었었는지, 도끼에 찍혀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있는 언니를 발견한 채 어느새 방 한 가운데 얼어붙은 듯 꼼짝없이 서 있는 것이었다. 리자베따는 언니에게 학대 받던 가난한 백치이자 유로지비 (holy full, 바보성자)였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녀의 언니인 전당포 주인을 죽여서라도 보호하고 도와주고자 했던 부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그녀까지 죽여야만 했다. 유일한 목격자이기 때문이었다. 비극이었다. 이 의도치 않은 두 번째 살인은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적 오류가 무고한 피를 흘림으로써 그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기도 했다.

감칠맛 날 수도 있겠지만, 여기까지가 전체 소설의 약 1/6에 해당되는 내용을 살인 동기 위주로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마지막 장,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800 페이지에 달하는 이 소설의 대부분을 이루는 중추는 살인사건 이후부터 자백하기 전까지의, 약 2주 간에 걸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이 얽히고 설킨 실타래라고 볼 수 있다. 그 복잡한 실타래는 모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되어 주인공의 불안하고도 혼란스러운 심리 변화를 적나라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탁월한 도구가 되어준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러시아 특유의 등장인물의 다채로운 이름과 짧은 시간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의 맞물림, 그리고 등장인물의 화려하고 긴 언변에 휘둘려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소설의 마지막까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읽는 내내 잠시도 엉덩이에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인간 심리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도스토예프스키만큼 탁월한 작가가 또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이 책의 본론 부분이야말로 과연 진미였다. (사실 이 부분은 내가 중학생 시절 너무 지루해서 미처 다 읽지 못하고 포기했던 부분이다. 나도 ‘언젠가 한 번은 '죄와 벌'을 읽어야지’ 했던 많은 독자들처럼 이 부분에서 길을 잃고야 말았었다.) 다시 말해, 죄를 저지른 이후 그 죄를 자백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이 이 소설의 핵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죄와 벌'을 읽어냈다고 하는 건 이 부분을 얼마나 소화해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자백할 때도, 또 자백한 이후 시베리아에서 1년 간 감옥 생활을 할 때조차도 사실 그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지 못했었다. 비록 양심이란 것이 인간의 본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직접 깨닫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기는 했지만, 그는 그저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분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죄를 자백한 이유는 그저 그 편이 더 유리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장 뒤에 덧붙여진 짧은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라스꼴리니꼬프는 구원에 이른다.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을 깨닫고 난 이후였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친 이후, 그는 단절되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을 열게 되어, 모든 것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환희의 순간이었다. 소냐도 라스꼴리니꼬프의 내적변화를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그는 마침내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죽여 이중적인 생활을 해왔던 소냐, 그리고 타인을 죽이고 자신도 죽여서 정의도 자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단절과 소외, 괴로움과 고독 속에서 딴 세상을 마치 벌을 받듯 살아왔던 라스꼴리니꼬프, 두 사람 모두에게 그 구원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주위 환경이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얼어붙었던 라스꼴리니꼬프의 마음엔 처음으로 기쁨과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남아있는 7년이란 감옥생활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고난 가운데에도 분명히 존재할 사랑과 희망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구원은 철저히 외부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책을 통해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상도 양심도 돈도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과연 열매를 맺을지 확실치 않은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헌신적이고 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인 소냐의 사랑이 차디차게 얼어붙었던 라스꼴리니꼬프의 마음을 마침내 녹여냈던 것이다. 그는 감옥에서 자유를 찾았으며, 바닥에서 하늘을 맛본 자였다.

책을 덮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구원의 감격이 밀려왔다. 읽는 내내 긴장을 동반한 두려움을 느꼈었다. 더럽고 추한 인간의 본성에 경악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 역시 그러한 인간이란 사실에 처절한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책 속에 나온 죄도 벌도 모두 나를 빗겨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겉으론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 나도 동일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았고, 모든 것이 인과응보대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서로 죽고 죽이는 추악한 인간의 삶 속에도, 한 줄기 구원의 서광이 비취게 되면, 동일한 환경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며, 그 동일한 환경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타락에서 구원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결말에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 신학서적에서도 잘 그려지지 않는 기독교적인 구원이 오히려 이런 문학 작품에서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놀라웠다.

인간은 소원을 성취하고 싶어하며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 인간만이 가진 이성은 이때 강력한 힘이 되어주지만,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현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성이 아무리 옳고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것이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파괴하는 방향으로 쓰이게 될 땐 이성조차 죄가 된다. 살인은 명백한 죄다. '죄와 벌'은 살인이 피해자만이 아닌 살해자 역시 결국엔 살해한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보여주었다. 살인은 타자도 죽이고 나도 죽이는, 본질적으로 이중살인을 내포하는 것이다. 또한, 조금 더 넓은 해석을 적용해보자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살인이지만, 관계를 죽이는 것도 살인이라고 볼 수 있다. 관계의 단절과 고립, 파괴를 야기하는 모든 행위가 살인에 해당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인을 저지르고 난 이후 라스꼴리니꼬프의 삶은 죽음보다 못한 죽음의 삶이었다. 그건 죄에 대한 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관계의 죽임이 죄라면 그 죽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벌이다. 이런 이유로 구원은 관계 속에 임한다. 막히고 끊어지고 파괴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소냐의 사랑이 없었다면 라스꼴리니꼬프의 구원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라스꼴리니꼬프의 구원이 가능했던 것은 소냐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냐의 사랑을 드디어 느끼고 그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사랑해준다는 것, 이는 언제나 우리에게도 구원의 빛이 임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은 구원의 통로로써 진정한 은혜이자 선물이다. 글을 마치며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관계 속에서 사랑을 주거나 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관계는 살아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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