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화보집 같은 책
흥미로운 화보집 같은 책
  • 정한욱
  • 승인 2019.03.22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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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트리그, 리딩 아트 - 293개 작품으로 만나는 미술 속의 책, 클, 2018년
데이비드 트리그, 리딩 아트 -293개 작품으로 만나는 미술 속의 책, 클

『리딩 아트 : 293개 작품으로 만나는 미술 속의 책』은 책이나 독서행위를 묘사했거나 책을 작품의 재료로 삼은 동서고금의 미술작품 293편을 모아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 책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여러 작품들은 초월과 권태, 쾌락과 좌절, 창조와 파괴 같이 독서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 경험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었던 귀한 숭배 대상에서 값싸고 흔한 설치미술의 재료가 되기까지 책의 위상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잘 보여주기도 한다. 책과 독서, 그리고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읽어볼만한 흥미로운 화보집이다. 

머리말에 있는 저자의 설명을 인용하여 시대에 따라 책과 책읽기가 예술작품 속에 어떻게 표현되어 왔는지 간단히 살피기로 한다.

중세    인쇄기와 대량생산이 확산되기 전인 중세 시절까지 책은 귀한 물건이었고, 때로 그 자체로 정교한 예술작품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초상화와 정물화에 묘사된 책은 작품 속 대상 이 가진 지성이나 부 또는 경건함을 상징했다. 시편과 기도문 같은 채색 필사본에 등장하는 성인들이 들거나 읽고 있는 코덱스는 그들의 독실한 신앙을, 교회의 프레스코화나 제단화 속 성경의 이미지들은 성직자들의 권력과 권위를 상징했다. 12세기 말 대학이 발생하고 수도원 바깥에서도 지적 활동이 가능해지자 책의 생산이나 유통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책 산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초기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수도원 밖에서 일하는 필경사들과 제본업자들의 증가로 필사본 가격이 내려가자 개인적으로 책을 소유하는 수집가들이 등장했으며, 인쇄기의 발명으로 이러한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어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름대로 소소하게 책을 수집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에서 인문주의 학자들의 손에는 대개 고전 작가들의 작품이 들려 있으며, 이는 지적 활동의 자유와 개성적인 표현능력이라는 덕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7세기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회화에서 꽃피운 바니타스(라틴어로 헛됨)이라는 장르에서는 낡고 너덜너덜해진 책들을 통해 책과 그 속에 담긴 지식이 언젠가는 쇠퇴하고 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암시했다.

Gerard Dou, Old Woman Reading a Bible

근대와 여성의 책읽기   종교 개혁 이후 유럽에서 성경이 각국 언어로 번역되면서 보통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성경이든 세속적인 책이든 ‘개인적’으로 독서하는 모습이 그림에 등장하기 시작하며, 여기서 문자화된 신의 말씀을 읽는 행위는 성직자의 매개 없이도 스스로 가능한 활동으로 표현되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신앙이나 교화가 아닌 쾌락을 위한 독서라는 새로운 발상에 따라 여성들의 사적인 책 읽기가 온전히 세속적인 활동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18-19세기에는 더 많은 여성들이 독서를 통해 자기 인식과 독립심이라는 새로운 감성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이는 여성의 독서를 사회의 도덕성을 위협하는 유행으로 간주하는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현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책은 대량생산 상품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아 더 이상 예전처럼 성스럽고 귀한 물건이 아니었으며, 이제 싸고 오래가지 않으며 심지어 쓰다 버리는 일회용으로 전락한 책들은 현대 예술가들의 손에서 해체되거나 변형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조각, 회화, 설치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책은 영원하지 않으며, 곰팡이가 피거나 벌레가 먹거나 불에 타거나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손상되기도 했다. 책은 문명사회의 상징이며 책을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는 문화의 일부를 파괴하는 야만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사람을 불태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책은 결코 완전히 파괴될 수 없으며 개별 책들은 파괴될지라도 그 안에 담긴 정신은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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