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희]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박만희]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 박만희
  • 승인 2019.03.20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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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희 전도사의 설교 - 창세기 15장 1-12, 17, 18
Enrique Simonet, “Flevit super illam” (He wept over it), 1892)
Enrique Simonet, “Flevit super illam” (He wept over it), 1892)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월터 브루그만, 안식일은 저항이다, 복있는사람, 2015년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주에는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라는 문구를 가지고 사순절을 생각해보려고 했습니다. 기억나는 내용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이야기 끝에, <안식일은 저항이다>라는 책 제목을 빌어 사순절 역시 저항의 의미를 듬뿍 담고 있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드렸습니다. 흔히 생각하듯 사순절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가려는 길에 우리의 걸음 하나를 더하는 시간입니다. 움츠리는 시간이 아니라, 활동을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시험과 시험을 이긴 일은, 선악과를 두 번 따먹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선악과를 먹어 타락한 세상에서 그저 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몸소 시작하겠다는 결의이며 용기입니다. 세계를 먹이로 보는 시선을 멈추고, 타인의 얼굴을 수건으로 덮지 않으려는 시간입니다. 멈춤 버튼을 누르고, 새로운 길을 내는 시간이 사순절인 겁니다.

그런 점에서 사순 절기는 저항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만약 무언가 하던 것을 멈춘다면, 죄책감 없이 먹던 일을 중단한다면, 무심하게 쏟아 내던 말을 의문시하고 바꾼다면, 그건 과거 예수님이 당했던 고난이 안쓰럽고 미안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걸음과 그가 가려는 방향에 우리를 더하기 위해서 일겁니다. 당연하지만 악마적인 세계에 대한, 하찮지만 꽤 괜찮은 저항일겁니다. 이번 사순절은 우리에게 저항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버티고 이겨서 열어놓은 가능성을 맛보고 그와 함께 걷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입니다. 강한 고집이 느껴지는 한 마디죠. 저도 간혹 하는 말이지만 제 말을 제목으로 삼을 만큼 뻔뻔하지는 못합니다. 그럼 누가 말했을까요. 예수님의 말입니다. 오늘 본문과 함께 읽게 되어있는 누가복음 9장 33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의에 찬 말씀입니다. 시작된 길을 끝까지 걷겠다는 견고한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구절이죠. 어쩌면 지금까지 말한 사순절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주는 한 구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의에 찬 예수님과는 달리, 본문에는 어딘가 시들시들하고 기운 없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이 기운이 없어 보인다는 제 말은 아마 오해가 아닐 겁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읽어보면 왜 그런지 금방 드러납니다. 아브람에게는 자신을 상속할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3절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2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3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내용은 간단합니다. 다 늙도록 상속할 자식이 없다는 겁니다. 게다가 약속은 있는데 실체는 없습니다. 혹시 아브람은 잘못 걸린 게 아닐까요. 듣도 보도 못한 신에게 보이스 피싱은 비교도 안 되는 인생 사기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도 그럴 것이, 아브람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진 지식이 없었습니다. 처음이었으니까요. 목사도 신앙친구도 없이 혼자 알아가야 했으니까요. 아브람은 지금 야훼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좋게 말하면 야훼 하나님을 배워가는 중이지만, 그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아브람이 아는 하나님은, 지금 기독교가 아는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집트 신들을 박살내고 홍해를 가른 하나님은 저 뒤에나 가야 나오죠. 그런 전능함과 막강함을 아브람은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의 믿음이 좋고 나쁘고를 쉽고 운운하지만, 아브람은 인생 말년에 엄청난 모험을 하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야훼 하나님은 어느 날 아브람을 바벨론에서 불러냈습니다. 아브람에게 야훼는 듣도 보도 못한, 작은 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람이 살던 땅에는 이미 많은 신들이 있었으니까요. 아브람의 아버지를 돌봐주던 집안 신 정도로만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람에게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가진 지식이 없었습니다. 몰랐으니까요. 전부 처음이니까요. 성경은커녕 구전으로 전해주던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그런 듣보잡 신에서 꼬드김을 당해서 집을 떠난 겁니다. 그리고 달달한 약속을 하는 겁니다.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복 자체가 되도록 하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는 이미 할아버지였습니다. 심정이 어땠을까요. 처음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긴가민가하지만 속는 셈치고 믿어보자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늘그막에 제 2의 인생을 살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들떴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실체가 없는 겁니다. 아이가 생길 조짐이 없는 겁니다. 약속은 있는데 실체가 없는 겁니다. 아는 사람은 알겁니다. 약속에 건 삶의 덩어리가 클수록, 약속의 성취가 지연될 때 겪게 되는 실망감, 상실감, 배신감, 무력감 등이 얼마나 큰지 말입니다. 차리라 약속을 하지 말든가 말이죠.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약속합니다. 처음도 아닙니다. 벌써 몇 번째 반복되는 약속입니다. 차라리 빨리 지켜 주면 될 텐데, 아브람이 ‘아닌가 보다’ 할 때마다 약속을 갱신하시는 겁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 격려하고 힘을 줍니다. 수고로운 삶에 대해 훗날 다 보상 받을 거라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때는 이 때다 싶었을까요.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꼬투리를 붙잡아 따져 묻습니다. 어떻게 보상해 주겠냐고 말이죠. 이제 자녀를 낳기는 글렀으니, 무슨 수로 보상해주시겠냐고 아브람은 묻습니다. 그리고 회한이 담긴 심정으로, 무기력하게 그는 말합니다. 자신의 남종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될 거라고 말이죠.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차라리 말이나 말았더라면’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지키지도 않을 약속, 하지나 말지’ 하는 맥 빠진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아브람에게 믿음이 있네 없네 하고 판단할 마음이, 저는 조금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 아브람이 안됐던지 하나님은 그를 바깥으로 불러냅니다. 바깥으로 나온 그에게 하나님은 하늘에 놓인 수많은 별을 보여줍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 훨씬 많은 별이 있었을 겁니다. 끝도 없이 늘어선 별을 보면서 아브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멋지고 장엄했을 밤하늘을 보여주면서 ‘네 자손이 저렇게 될 거라고, 셀 수 없는 저 별 만큼 많은 후손을 갖게 될 거’라고 말씀합니다. 늘 들어서 그렇지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문학적이면서도 감동스런 장면입니다.만 솔직히 저라면 맥 빠질 것 같습니다. 제게 필요한 건 아름다운 별을 감상하는 게 아니니까요. 허황된 약속이 아니니까요. 저라면 수작부리지 말고 물증을 달라고 하겠습니다. 별이라도 따다 주겠다는 철지난 헛소리도 아니고, 누구한테 장난질이냐고, 무서우니 속으로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브람의 마음속까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아브람에게 필요한 건 약속이 아니라, 실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또 약속이라니요. 여기서 놀라운 건 아브람의 반응입니다. 본문은 아브람의 반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부분은 익숙한 개역개정으로 읽겠습니다. 6절입니다.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Abram Guarding His Sacrifice, c. 1896-1902, by
James Joseph Jacques Tissot(1896-1902), Abram Guarding His Sacrifice

유명한 구절입니다. 믿음에 관한 수많은 설교에서 소환되는 말씀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와 함께 믿음에 관한 가장 유명한 내용이기도 합니다.만 저는 잘 이해가 안갑니다. 아브람의 갑작스런 비약은 뭘까요. 수많은 별이 탐이라도 났던 걸까요. 무엇이 그의 태도를 바꾸어 놓았을까요. 훗날 어렵사리 얻은 아들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만큼 어마 무시한 믿음을 가진 아브람이지만, 그때는 약속의 성취를 맛보기라도 했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아이를 얻는 기적을 맛보았으니까요. 그런데 본문에서 아브람은 어떻게 갑자기 믿게 되었을까요. 믿은 아브람이야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본문이 믿음의 모범을 드러내주는 이야기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브람은 늘 완벽하고 굳건한 확신을 가진 믿음의 본으로 거론 되곤 하니까요. 본문을 보던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나?’ 싶은 한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12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2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인상 깊은 구절이라 가톨릭성서 번역으로도 읽어보겠습니다. “12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고 말입니다. 강렬한 표현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브람의 믿음과 수많은 별 이야기에 묻혀서 눈에 띄지 않던 구절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믿음이라도 받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듯 순결하고 견고한 믿음인 줄만 알았더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나 봅니다.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는 표현은, 아브람의 믿음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또 그의 심정이 어땠는지를 잘 드러내줍니다. 그가 걷고 있는 걸음이 얼마나 살 떨리고 불안한 여정이었는지를, 얼마나 위태로운 삶이었는지를 잘 드러내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사람들은 쉽게 떠받들지만, 아브람은 거창하면서도 간단한 그 호칭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높이며 ‘믿음은 아브람처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만 같습니다. ‘당신들은 내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고 말입니다. ‘당신이 칭찬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나는 모른다.’고 말입니다. ‘잠들 때조차 나를 짓눌렀던 깊은 어둠과 두려움을 모른다면 내 믿음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내 믿음을 빼앗아 가지 말라’고 그는 말할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아브람의 믿음은, 그를 짓눌렀던 깊은 어둠과 공포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게 아닐까요. 이때 믿음은, 그를 짓누르던 어둠과 공포를 뚫고 나가는 순백의 무엇이 아니라, 깊은 어둠과 공포를 떼놓고는 말할 수 없는 무엇이 아니었을까요. 성서가 높이 칭찬하듯 그는 분명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듯 때 묻지 않은 순결한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깊은 어둠과 공포로 뒤범벅된 살 떨리는 믿음이었죠. 그렇다면 그의 믿음은 가짜인가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는 믿었기 때문에 깊은 어둠과 공포에 짓눌린 겁니다. 깊은 어둠과 공포에 짓눌린 중에 그는 믿은 겁니다. 그게 믿음이라고 본문은 말해주는 듯합니다.

자손을 얻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만 이 이야기를 읽을 필요는 없을 겁니다. 본문은 지연되는 약속에 남은 인생을 건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그가 기댄 약속은 단지 번영이었을까요? 아브람은 번영 하느냐 마느냐에 생사를 걸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서에 따르면 아브람은 노아 홍수 이후에 다른 길을 걸으려는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인 까닭은, 그 믿음의 순도가 높아서가 아니라,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을 때에도 처음 길을 걸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떠남’으로 시작했을 겁니다. 있던 곳을 나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는 새로운 일이 시작될 새로운 땅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한 자손은, 단순히 아브람의 대를 잇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시작한 이 길이 계속 될 것인가의 문제죠. 자손은, 그 길을 계속 걸을 누군가가 있을지의 문제입니다. 근데 불임인 겁니다. 불임의 세계인 겁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 같지 않고, 이제 막 시작한 길이 금방이라도 끝날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러는 중에 아브람은 믿겠다고 고백합니다. 끝이 아니라는 쪽을 그는 선택합니다. 그러니 어둠인 게 당연합니다. 오히려 믿기 때문에 짓눌리는 어둠이고, 두려움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믿는 겁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제물들을 반으로 쪼개 놓으라고 지시합니다. 무엇을 하시려는 걸까요. 깊은 어둠과 공포에 아브람이 짓눌려있던 그 때, 하나님은 밝은 횃불로 나타나, 쪼개놓은 동물들 사이를 지나갑니다. 이는 맹세의 한 형태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도 쪼개진 제물처럼 될 거라는 의미를 담은 행동이라고 합니다. 목숨을 건 약속인 겁니다. 이상한 말이지만, 하나님이 목숨을 건 약속을 하는 겁니다. 찢길 각오를 한 약속을 하시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도 될까요. 아브람처럼 말입니다. 믿음을 들고 깊은 어둠과 공포 속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다시 오늘 제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 구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3장 33절입니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가려는 길에서 깊은 어둠과 공포를 마주했다면,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해 갑니다. 그것이 목숨을 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을 겁니다. 깊은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함께 걸을 거라는 소망이었을 겁니다. 그 믿음과 소망이 부활로 예수를 이끌었을 겁니다. 아브람처럼 예수님 역시 불임의 세계에서 자신의 길을 갑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과 함께 읽게 되어있는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아무리 바울이더라도 좀 뻔뻔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아닌데 무슨 배짱으로 그랬을까요. 바울이 본받으라고 하는 자신은, ‘배를 자기네 하나님으로 삼고,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 세계에 저항하는 바울입니다. 재밌는 표현입니다. 배를 자기네 하나님으로 삼다니 말이죠. 세상을 먹는 대상으로만 보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표현일겁니다. 바울은 그거 말고 그리스도의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바울도 믿는 겁니다. 불임처럼 보이지만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고 믿는 겁니다. 끝이 아니라고 믿는 겁니다. 그는 믿기 때문에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본받으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믿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는 건, 종교생활 열심히 하는 걸 말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후에도 나의 길을 가겠다는 예수 안에 굳건히 서는 겁니다. 받았던 시험을 이기고 걷는 걸음에, 우리의 걸음 하나를 더 얹는 겁니다. 아브람도, 예수님도, 바울도 주변을 둘러보며 ‘누가 있지? 대체 나는 뭘 보고 계속 가야하는거지?’라고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물었던 이들일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깊은 어둠과 공포에 짓눌리면서도 믿기로 했고, 또 누구는 ‘나는 내 길을 가겠다’고 결연히 마음을 정했으며 자신의 몸을 찢었습니다. 또 다른 누구는 본받으라고 뻔뻔하지만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 뻔뻔함이 그에게는 믿음이었을 겁니다. 자신에 배를 하나님 삼는 세계에 저항하자는 몸부림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역시 묻고 답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 마치겠습니다.

 

설교자 박만희는 신대원 졸업 후, 함께걷는교회를 개척하여 4년째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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