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성경에 제사법이 왜 있을까요?
[김동환] 성경에 제사법이 왜 있을까요?
  • 김동환
  • 승인 2019.03.18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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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목사의 설교 - 레위기 1:1-9
Zurbarán, "Agnus Dei"(Prado Museum, c. 1635–1640)
Zurbarán, "Agnus Dei"(Prado Museum, c. 1635–1640)

1. 성숙한 모임이 되어가길!

어느덧 길섶 교회가 시작된 지 7개월 차가 되었습니다! 주중에 만난 교회 청년에게 지난 반년 동안의 공동체 생활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도움을 받아요. 말씀을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무언가 작은 거라도 실천해보려는 모습들 속에서 서로 격려받고, 위로받으며 사는 게 전부가 아닐까 싶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저희 교회가 더 성숙해지길 기도해봅니다. 작더라도, 성숙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7개월 차가 됐는데도 아직 못 다룬 주제들이 많아요. 오늘은 레위기의 제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이번 주는 모세오경, 다음 주는 예언서 본문을 다룰 텐데요, 두 주 연속으로 ‘예배’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보려 해요. 오늘은 오경의 가장 긴 이야기 중인 하나인 제사 본문을 다뤄보면서, 오늘 우리의 예배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하나님 앞에서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요!

 

2. 교회와 성경

레위기를 읽어보신 적 있나요? 아마 읽어보신 적은 있으실 거예요, 창세기 출애굽기까지 재밌게 읽다가, 레위기 가면 딱 막히잖아요? 제사법에 관한 이야기가 꽤 길게 나와서 읽기 쉽지 않아요. 이 제사법 이야기를 아무런 이해 없이 읽기만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근본적인 이해 없이, 제사의 종류는 뭐고, 제물은 어떤 걸 드려야 하고, 순서는 무엇이고, 이렇게 외워봤자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크지 않다는 뜻이에요. 저희가 제사를 드리며 살지는 않으니까요!

유대인들도 1세기에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는 말씀 교육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었어요. 그전에는 제사 공동체로 살아갔다가, 어느새 제사와 말씀 교육이 두 쌍이 되어서 공동체가 운영되었죠. 성전이 파괴되면서 회당 중심의 공동체로 완전히 조정되었고요, 아주 소수의 극-보수 공동체만이 지금도 성경에 쓰인 제사를 드리고 있어요. 이때 말한 ‘보수’는 ‘성경에 적힌 그대로를 실행하려는’이라는 의미로의 ‘보수’에요. ‘지키는’ 사람인 거죠. 나쁜 의미는 없어요, 유대인이라면, 그게 맞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어떤 본문은 극단적으로 지키면서 어떤 본문은 전혀 지키지 않는 건 일관성이 없어 보이거든요. 교회는 좀 다르죠!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서 모든 걸 새롭게 해석해요. 길섶 교회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교회’는 그런 거예요.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성경에서 취할 것을 취하고, 새롭게 해석할 것은 새롭게 해석하는 거예요. 교회 공동체에서 어떤 구절을 문자적으로 지키게 가르치는 건 교회적이지 않은 거예요. 조금 어렵죠? 쉽게 이야기하면, 레위기에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적혀있다고, 돼지고기 안 먹게 가르치면 교회적인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또,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길게 적혀있다고, 제사를 지켜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교회적 가르침이 아닌 거죠. 마찬가지로 교회를 ‘성전’이라고 말하면 안돼요. 성전은 사라진 유대교 신앙의 언어니까요. 성전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나눠볼게요, 다시 돌아가서, 오늘은 ‘제사’에 대해 생각해보아요.

 

3. 성경에 제사법이 있는 이유는?

자, 질문을 드려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란 무엇인가요? 뭔가 아는 것 같은데, 선뜻 답이 안 나올 거예요, 레위기에는 제사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제사란 무엇이고, 왜 드려야 하는지는 정확히 나와있지 않으니까요. 쉽게 생각해 보아요, 사람이 무언가 하나님께 드리는 절차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동물일 수도 있고, 곡식일 수도 있고요.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리는 형식이 제사법이죠.

그럼 조금 더 어려운 질문을 드려볼게요, 제사는 왜 드리나요? 하나님께 사람이 무언가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냥 무언가를 바치라고 했으니까 드리는 거지, 뭘 그렇게 따지세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할 고민이 바로 이런 거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가 제사를 드릴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믿는 공동체잖아요? 제사의 종류, 순서를 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의미를 고민하고 고민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지를 생각해보아야 되는 거죠.

우선 기독교 신앙고백에 맞추어 대답을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어요. 하나님은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에요. 제물을 받으려고 우리를 창조한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제물을 받으려고 사람을 창조했다고 믿는 건 야훼 신앙이 아닌, 고대 근동의 산앙이에요. 바로 신앙이 싸우고 있는 다른 종교들의 내용이라는 거죠. 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 중의 하나가 ‘무로부터의 창조’에요. 성경 말씀에 있는 단어는 아니지만,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이에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외적, 내적 강제로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무언가 부족한 게 있거나, 필요한 게 있어서, 받고 싶어서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니라는 말이죠.

사람은 언제나 받고 싶은 게 있고, 필요한 게 있잖아요? 선물 받아서 싫어할 사람이 어딨어요? 이런 마음을 우리가 신에게 투사를 하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신의 모습과 닮아지는 거예요. 그것은 기독교 신앙고백적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마음을 토대로 만들어낸 우상이 되는 거죠. ‘하나님, 제가 이거 해드릴게요, 그럼 이것 주세요’ 이렇게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는 것도 다 ‘투사’라고 보시면 되어요. ‘내가 이러니까 하나님도 이러실 거야’라고 상상하는 거죠.

자, 그렇다면 제사법은 왜 있는 걸까요? 하나님이 제물이 필요하신 게 아니라면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겠어요? 사람에게서 찾아야겠죠? 제사를 드려서 환경문제를 해결하자, 이런 건 아닐 테니까요. 뭔가 태우면 대기오염만 생길 뿐입니다. 나와 신앙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 게 제사예요. 레위기의 앞에 있는 책이 무엇인가요? 출애굽기잖아요? 하나님께서 노예 공동체를 이집트에서 해방시켜준 이야기입니다. 수백 년간 자유가 박탈당한 채 살아가던 사람들이 새로운 공간으로 나왔어요. 허허벌판이라 막막하지만, 먹을 것도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얻었기에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는 거죠. 새롭게 구원받은 공동체에 필요한 건 무엇이었을까요? 말씀, 그러니까 성경책이나 설교도 없는 상황이잖아요? 아무것도 없는데서 신앙생활을 새롭게 세팅해야 했어요, 이때 하나님께서 택하신 훈련방법이 바로 ‘제사’였던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와서 모세의 말을 잘 들었나요, 안 들었나요? 성경을 조금만 읽어본 사람을 아실 거예요. 잘 안 들어요. 배고프다고, 맛있는 거 없다고 싸우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만 해요.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를 성숙하게 사용할 힘이 아직 없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 잘 바뀌지는 않잖아요? 하지만 거룩한 백성이 되어가야 할 이스라엘 공동체였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대안은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제사였어요. 이스라엘 공동체가 광야에서 이동할 때, 지파별로 이동을 했어요. 12지파들의 가운데에는 성막이 있었고요. 그러니까 각 지파의 공동체 사람들은 항상 중앙에 있는 성막을 보게 되어있는 거예요. 그 성막에는 제사를 집례 하는 제사장들이 있고요. 이동할 때 성막을 해체하고, 운반하고, 재조립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레위인들이에요.

이스라엘 공동체가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규칙으로 훈련받는거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지키지 않는 어떤 죄를 지었을 때, 누군가의 재산을 파손했거나, 성전의 물건을 파손했을 때, 혹은 좋은 일이 생겨서 제사장들과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을 때 등등 이럴 때마다 제사를 드리게 되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삶의 중심이 신앙이 되도록 돕는 장치가 제사인 거죠. 하나님의 필요라기보다는 신앙공동체가 성숙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가 제사예요. 오늘 읽은 본문은 번제에 관한 이야기예요, 레위기에서 첫 번째 제사법으로 등장하지요. 그런데 이 번제는 좀 특이해요. 말 그대로 태우는 제사잖아요? 사실 다른 제사법도 다 태우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냥 제사 일반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해도 될 것 같아요. 속죄제는 죄를 지었을 때, 속건제는 이웃이나 성전의 기물을 파손했거나 이웃에게 무언가 잘못했을 때, 이렇게 구체적인 상황이 있는 건데, 번제는 그냥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일반적인 형식으로 설명돼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기 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잖아요? 제단을 쌓고 불을 피워서 무언가의 향을 올려드리는 건 사실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제사 형태인 것 같아요. 레위기가 쓰이기 전에 아브람이 어떻게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할 때 했던 행동이니까, 너 왜 레위기 제사법에 맞게 안 하고 이방 종교인처럼 제사를 드리냐!라고 꾸짖진 않으시겠죠? 어쨌든 그 행동의 본심을 보고 아브람의 제사를 받으셨으리라 믿어요. 어쩌면 이렇게 고대의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인 습관을 야훼 신앙적으로 새롭게 변화시킨 게 제사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중요한 것은 구약의 신앙고백에 맞게 일반적인 제사 풍습을 어떻게 바꾸었느냐가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거죠.

 

4. 제사의 의의

일단 레위기 1장 2절을 보면 이 제사를 언제 드리라는지 나와있어요. 언제 드리면 되나요? 공동체 구성원이 원할 때 드리는 거예요. 그것이 설령 속죄 제라 할지라도, 죄를 깨닫고, 아 내가 제사를 드려야겠다는 결심이 스스로 설 때 제사를 드리는 거죠. 물론 절기마다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제사도 있지만, 일상의 제사는 근본적으로 자발적이라는 데에 아주 큰 특징이 있어요. 이런 면에서 우리의 모든 신앙 활동은 자발적이어야 해요. 예배, 공동체 훈련, 헌금, 찬양, 전도, 모든 신앙 활동은 여러분이 원할 때 하는 거죠. ‘저는 그런 거 원하지 않는데요’, 정말 어떠한 신앙적인 이유로 하고 싶은 활동이 하나도 없다면, 본질적으로 나에게 신앙이 있는지 점검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고 하고 있느냐를 보는 게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성경의 제사는 제물을 고르는 것도 자발적이에요. 그러니까 각자의 경제상황에 맞추어서 제물을 고르는 거죠. 재정상황이 괜찮은 사람은 양이나 염소, 조금 힘든 사람은 비둘기, 혹은 곡식을 드릴 수도 있어요. 이것도 무슨 재산을 등록해서 거기 맞춰서 내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정해서 드리는 거예요. 재밌는 건 아무리 재산이 많은 사람도 똑같이 양이나 염소 한 마리로 제한이 걸려있다는 거예요. 오늘로 따지면 아무리 부자여도 헌금을 할 수 있는 금액에 제한이 있다는 거죠.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에서는 왕이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어떻게 하나요? 어마어마한 양의 제물을 바치잖아요? 성경의 제사법은 이런 걸 막아요, 제한이 걸리는 거죠.

이런 이해를 가지고 제사 본문을 묵상해보세요. 구약시대에 제물을 드리는 것과 비슷한 게 오늘의 헌금이잖아요? 절대 똑같지는 않아요, 유사한 거죠. 저희 교회는 자발적으로 한 달에 3만 원의 헌금을 받아요. 기준은 3만 원이지만, 재정상황이 힘드신 분은 3천 원이라도 헌금을 해보길 권면해요. 아시다시피, 교회 통장은 모든 구성원에게 오픈되어있는 모임통장이고요, 저는 100원도 사적으로 쓰지 않아요. 다만 레위기의 제사법을 유사하게 따라 해서 우리 공동체에 적용해보는 거예요. 사실 제사장들이나, 혹은 나중에 이 신앙공동체의 봉사를 위해 생업을 하지 않는 레위인들 위해 공동체가 십일조를 하는 형식으로 발전이 되죠. 그래서 레위인들이 처음에는 성막을 해체, 운반, 조립을 하는 일꾼들이었다가 가나안에 정착해서는 신앙공동체의 영적 건강을 책임지는 상징이 되고요, 그래서 책의 제목이 레위기가 되어요. 제사 장책이 아니고요.

현실 교회에서 너무 많은 금액을 받는 목회자가 있는 교회도 문제지만, 전혀 지원이 없는 것도 좋은 것 같진 않아요. 목회자를 생각해서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신앙공동체의 특징이 그런 것 같아요. 거꾸로 헌금을 너무 많이 한다! 목회자에게 한 개인이 후원을 너무 많이 한다! 저는 이것도 성경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앞서 말했듯이 제물의 양에 제한이 있다고 했잖아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이것도 교회 공동체에게나, 목회자 자신에게 유익한 것 같진 않더라고요^^; 헌금을 많이 하고 신앙공동체에 다른 영향을 주는 것도 레위기의 시각에 맞지 않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동체 구성원 간의 관계도 제사의 주제가 된다는 거예요. 저희도 좋은 일 생겼을 때, 내가 한턱 쏠게!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 의미의 제사도 있고요, 친구에게 잘못했을 때, 용서를 구하는 의미의 제사도 있어요. 물론 변상하고 제사를 드려요. 아무런 사과도, 손해배상도 안 하고, 혼자 기도하고 용서받았다고 좋아하면 ‘밀양’되는 거예요. 영화 ‘밀양’ 보셨죠? 잘못은 혼자 해놓고 용서도 셀프로 하는 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죠.

성경의 제사는 공동체 간의 갈등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어요. 그러니까 남의 재산을 뺏아놓고는 모른 척하고 있으면 성막을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정상적인 야훼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이 어느 순간 도저히 안 되겠다 해서, 다시 변상을 하고 스스로 회개의 제사를 드리로 가는 거예요. 공동체가 스스로 정화될 수 있는 시스템이기도 한 거죠. 이때 중요한 것은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죽이고, 각을 뜨고 하는 약간 살벌한 일은 제물을 가져온 당사자가 하는 거예요. 제사장은 제단에 피를 뿌리고, 제물을 태우는 일을 해요. 이렇게 하면 과연 제사를 많이 드릴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고대사회라고 해도, 제단 앞에서 직접 동물을 죽이고, 살을 바르고 이러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게 한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정말 신앙에 있어 진지한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어야 그런 제사를 실천할 수 있다는 거죠. 물로 나중에는 제사장들이 직접 각을 뜬 거 같아요. 70인 역이라고, 후대에 외국인들이 주로 읽었던 성경에는 제사장들이 각을 뜬 걸로 묘사된 번역문들이 있거든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이런 제물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필요한 건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약간은 살벌한 과정이 이스라엘 공동체 게 필요했을까를 레위기를 묵상할 때마다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너무 편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예배를 여러 번 드리는 것, 저는 사실 그런 게 낯설어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닌 것도 아니고, 제가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했지만, 예배는 진지하게 드리고, 일상으로 돌아가서 열심을 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은데, 매일매일 예배만 드리게 가르치는 교회나 그렇게 하는 성도님들을 보면, 존경심도 들지만,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진 않아요. 제물의 각을 뜨는 마음의 진심, 그 열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일상으로 돌아가 예배자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게 레위기가 말하는 메시지라고 믿어요.

 

5. 이스라엘이 성막을 보듯이, 예수님을 보며 살기를

어때요? 레위기 제사법이 생각보다 부담스럽게 와 닿나요?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고, 무언가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 이 제물을 드리니 제 소원을 이루어주소서, 이렇게 가면 그건 이방 종교의 제사가 되는 거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레위기의 제사는 신앙공동체의 체질을 바꾸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기독교인인 우리는 제사를 문자 그대로 드리지 않아요. 대신 이스라엘 공동체가 일상을 살면서 성막을 보고 제물을 가지고 갔던 행동을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다시 죄를 고백하고, 또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솔직히 이야기하며 지적받고, 위로받고, 힘을 얻는 형태로 전환시키는 거예요. 예배를 드리고, 드릴 수록, 나는 죄에 대해 조심해지게 되고요, 내가 속한 공동체는 성숙한 모임이 되어가야 해요. 시간, 재정, 관계 등 모든 삶의 중요한 주제들이 제사 앞에서 재정리되듯이, 우리의 예배 앞에서 재정리되어야 합니다.

이런 제사법의 뒤에 있는 법의 정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종교행위에 빠져버리면 종교적 죄를 짓게 되어요. 이건 다음 주에 예언서 본문을 살펴보며 이야기할게요. 모세 오경에 아주 길게 제사법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성막과 제사에 관한 법이 성경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다룬 내용일 거예요. 그런데 또 어는 성경책들에는 이런 제사를 비판하고 드리지 못하게 하는 본문도 많거든요. 제사의 본질을 놓치고 제사를 악용하는 예를 말하는 거예요. 그런 예가 어떤 것들이 있을지는 숙제로 드립니다, 고민해보시고 다음 주에 이야기 나눠요.

오늘 이후로 또 일주일을 살아가실 텐데요.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막을 보며 살았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보며 살아야 해요.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는 살벌한 제사는 드리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제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동환 목사는, 길섶교회를 섬기며, 평일에는 초등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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