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욱] 현대철학의 바울적 계기와 그 의미
[정한욱] 현대철학의 바울적 계기와 그 의미
  • 정한욱
  • 승인 2019.03.18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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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 바울과 현대철학, 새물결플러스
김성민, 바울과 현대철학, 새물결플러스

현대철학연구자이자 인문교육운동가로 짓다 철학학교와 도서출판 짓다의 대표를 맡고 있는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현대의 대표적인 현대정치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책에서 사도 바울을 다루는 이유와 내용을 기독교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바울을 ‘철학적으로’ 사용하면서 정치철학의 ‘종교적 전회’라는 흐름을 만들어냈던 몇몇 사상가들의 핵심적인 논지와 주장을 그들의 대표적인 저서 한두 권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이 흥미로운 책이 다루는 학자들의 생각을 몇몇 문헌의 도움으로 간략하게 정리하여 앞으로의 공부를 위한 길잡이로 삼기로 한다. 단, 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요약하는 것은 내 능력을 한참 벗어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고백해야겠다.

 

현대철학의 바울적 계기와 그 의미

최근 바울의 텍스트나 그의 형상을 철학 특히 정치철학의 맥락에서 다루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바울에 대한 이러한 학문적 관심을 현대철학에서의 ‘바울적 계기’라고 부른다. 여기서 바울의 용도는 종교를 통해 현실을 비판하는 신학적 기획이라기보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긴장 속에서 퇴색되었던 종교의 급진성을 철학의 언어를 통해 재현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서 해석의 엄밀성을 확보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철학을 위해 바울의 텍스트를 ‘사용’하는 것이며, 성서는 서구사회에서 ‘경전’뿐 아니라 ‘고전’의 위상도 가지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현대철학적 논증에서도 충분히 하나의 예시로 사용될 수 있다.

바울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의 신학적 주장(복음)을 다룰 때 그의 유대적 조건(특수성)과 제국적 조건(보편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의 유대적이면서 제국적인 측면을 모두 다루는 방식이 바로 바울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바울의 글은 문명사적이고 정치적인 진술이 선교적이고 목회적인 진술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교리적 바울만 강조하다 보면 바울 서신의 다양한 맥락을 무시하거나 바울의 다양한 면모를 제거하여 지나치게 획일적인 해석만이 남게 된다.

한국에서 현대철학이 주목하는 바울의 급진적 사용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은 기독교이다. 위기에 빠진 한국 기독교는 게토에 갇힌 채 자신들만의 언어로 진리를 설파하고 가르치려 하기보다 동시대적인 물음과 역할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 타자적인 것을 자기 방식으로만 소화하거나 자기동일성을 강화를 위해서만 사용하려 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타자적인 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나 고려 없이 공적인 장에 참여하겠다는 태도는 소통의 이름으로 무지와 독단의 폭력을 자행하는 것이다.

 

바울과 현대철학의 주제

신학은 정치학이다   “신학은 정치학이다”라는 말은 바울의 교리 자체가 정치적인 것을 표상하기에 신학의 내적 분석을 통해 정치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개방해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조르조 아감벤은 성자가 초월적 신의 통치를 세계 창조와 연결하면서 세계 내에서 대리 통치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삼위일체 신학 자체가 세계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하나의 총체적인 정치이론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적 주체와 공동체   ‘바울적 주체’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자이자, 현재 완전히 확정되지 않고 미래와 함께 현재에 개방되어 있는 주체이다. 알랭 바디우는 바울에게서 보편적인 것 앞에서 평등한 주체를, 조르조 아겜벤은 분할적 주체가 갖는 특이성 즉 잔여적 주체를 강조한다. 바울이 주장한 ‘하나님 나라 시민’이라는 정체성은 로마제국의 보편주의까지 뛰어넘는 보편주의적 급진성을 가지지만, 이러한 바울의 보편주의는 잔여적 주체들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법과 정의   이는 전통적으로 바울신학에서 율법과 칭의라는 이름으로 중요하게 다뤄진 주제로, “율법을 폐하고 율법을 완성한다”는 바울의 역설적 논리는 법을 문제 삼지 않고는 정의에 대해 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법 너머에 신적 정의가 있다는 주장이다. 정의는 신적 정의를 구현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함(신실함, faithfulness)에 의해 성취된다.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에서 법보다 우위에 있는 정의에 대한 물음이 깊이 다뤄진다.

메시아적인 것   메시아주의와 ‘종말론’은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이 디스토피아로 귀결되는 ‘지금의 시간’ 또는 현재성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다룬다. ‘메시아적 시간은’ 현재에 들어온 사건의 시간으로서 현실에서 해방의 계기를 여는 시간이며, 메시아의 구원의 해방성 및 메시아적 시간의 현재성과 관계있는 ‘정치적인 것’에 관해 다룬다. 데리다의 ‘약한 메시아주의’나 벤야민의 ‘니힐리즘적 메시아주의’가 이에 해당한다.

무신론적 유물론과 신학    지젝은 자신의 책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삼위일체의 2위격인 성자의 케노시스 혹은 육화의 측면에 주목하면서 신학에서 유물론의 근원을 찾으려 하며, 유물론이 신학의 현실 적응력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현재의 기독교는 더 이상 무신론적 기독교의 문제, 유물론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현대철학자들의 ‘바울 사용’

니체의 기독교 비판   삶을 그 자체로 생장하고 보존하려는 본능을 지닌 ‘힘의 축적’과 ‘힘을 향한 본능’이라고 보는 니체는, 삶에 대한 긍정을 배격하고 약함의 미덕을 숭상하며 현세에 대한 허무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는 기독교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약하고 비천하고 실패한 자들”을 편들면서 정복당한 자들의 노예도덕을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고상한 도덕윤리로 바꾸고, 고통받는 현실을 신의 은총과 선물이라는 심리적 허구로 대치함으로서 긍정적 삶의 에너지를 부정한다. 예수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가르침과 행동을 통해 복음을 제시했고 십자가의 즉음 앞에서도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나,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을 복음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아 자신들의 원한감정과 복수심을 정당화하는 독특한 메시아주의를 창안함으로서 ‘허무주의적 정복주의 정신’을 기독교에 심었다. 니체는 서구 문명을 지배해 왔던 기독교의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지배를 새로운 시대를 열 인간의 전형으로, 바울의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를 대체할 ‘위버맨쉬’를 제시한다.

 

하이데거의 바울 ‘사용’과 그리스도인의 현사실성   바울의 기독교는 니체의 생각처럼 단순히 주어진 실존적 조건 가운데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인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에 허무적 힘(고통과 죽음)이 작동하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허무와 단절하기 위한 새로운 삶의 형식을 만들어내는 조건을 찾는 종교다. 그리스도인은 퇴락한 일상성에 떠다니지도 초월적인 상태에 영구히 머무르지도 않은 채, 두 관계 사이에서 ‘연관적으로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되어가는’ 메시아적인 삶을 살아간다. 바울은 ‘파루시아’라는 용어를 통해 역사적 시간으로 환원될 수 없고 과거-현재-미래로 나뉘지도 않는 ‘카이로스적 시간’ 혹은 ‘메시아적 시간’에 대해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선포와 결단이라는 일종의 종말론적 투쟁에 의해 현실화되는 이 시간은 현재에서 미래적 시간을 선취하며 수행한다. 이러한 바울의 독특한 시간 개념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연대기적 시간에 환원되지 않는 미래성으로서의 파루시아를 현재의 시간에서 긴박감과 비통을 가지고 경험하고 추구하게 한다.

발터 벤야민의 중단으로서의 메시아주의    벤야민은 모든 존재자는 필연적으로 몰락을 향해 치닫고 있지만, 바로 그 폐허와 고통 안에 ‘메시아적인 것’을 통해 구원의 시간으로 ‘도약’할 수 있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니힐리즘적 혁명성’을 강조한다. 메시아는 균질하고 공허한 양적 시간의 연속체인 역사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파국의 잔해더미 속에서 과거 억압받은 자들의 전통을 발굴에 기억하고 애도하는 현재의 자리, 즉 '지금시간'에 도래한다. 이것이 파국을 응시하면서도 역사의 폭풍우에 맞서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역사의 천사”(Angelus Novus)의 의미다. 메시아적 시간이 현재에 도래하면 세속의 시간과 메시아적 시간의 중첩이 이루어지고 갈등이 시작되며, 메시아적 시간은 세속의 시간을 통과하면서도 그것을 붕괴시키고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서 메시아적인 것을 현재에서 경험하게 한다. 역사가의 과업은 회상과 애도를 통해 과거를 회복하는 힘과 미래를 유토피아적으로 여는 힘이 함께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이며, 이러한 과거의 복원은 초현실주의적인 관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혁명적 성찰과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신은 부재하며 이러한 메시아적 과제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귀속된다.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현대의 법치국가는 원칙적으로 법의 이름으로 주권자의 직접적 개입 가능성을 배제하는 법실증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슈미트는, 주권자는 법질서가 유의미하게 구축될 수 있는 정상상태를 창출하고 ‘예외상태’(비상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예외적 존재’이며, 국가의 실존이 위협받는 ‘예외상태’에서는 위기를 극복하고 규범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통치자의 ‘결정’이 무기력한 ‘법’ 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주권자의 ‘결정’이 법질서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면서 법실증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극복하려고 시도했던 슈미트의 메시아적 통치 개념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과감한 개혁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독재적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막아서는 자’ 즉 ‘적그리스도’와 ‘원죄’로 규정된 정치적 반대자를 ‘최종 해결’ (Endlösung der Judenfrage)하려는 유혹에 빠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실제로 슈미트는 나치의 어용 법학자로 악명을 떨쳤으며 그의 법이론은 ‘유신헌법’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야콥 타우베스의 부정 정치신학    타우베스는 바울이 혈통적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구원의 질서인 ‘汎이스라엘’을 주창했으며, 이는 파국적 국면에서 역설적인 구원을 강조하는 유대교 메시아운동인 사바티아니즘과 같은 유대 신비주의 전통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로마제국'과 '유대적 혈연 공동체'로 대표되는 당대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던 (율)법의 완전한 폐기를 선언한다. 이 세상의 질서는 구제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썩어가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서를 추종하거나 저항하는 대신 메시아가 도래해 구원이 성취될 때까지 ‘마치 아니 사는 것처럼’(hos me) 조용히 살아가면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썩어가는 이웃들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정체성을 모두 거부당한 채 박해받는 ‘잔여적 존재’들이 모인 지하 공동체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 이 세계를 무화(無化)하고 지상의 질서를 틀 짓는 권력의 구조 자체를 폐기한다는 그의 기획은 ‘부정적 정치신학’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

알랭 바디우의 부활의 사건과 새로운 주체    바디우는 사도 바울을 현재의 사건에 개입하여 현실을 변혁하는 데 충실한 메시아적 투사로 본다. 바울에게 부활 사건은 주체의 ‘다시(새롭게) 일어남’의 사건이자, “죽음과 부정성의 지배에 맞서 삶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을 사건적으로 도래시키는 것”이었다. ‘부활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온 바울의 ‘그리스도교 담론’은 복종과 속박을 강요하는 지배적 담론인 유대담론(법)과 그리스담론(지혜, 철학)을 해체함으로서 주체를 해방하는 비-우주적이고 탈-법적인 담론이면서, 동시에 특수한 정체성과 관계없이 순수한 은총과 선물로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분열의 형태로 보편성을 추구하는 ‘보편적 개별성으로서의 진리’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개별적인 자유를 중요시하지만 그 자유보다 보편적인 규범인 ‘평등의 정의’가 우선하며, 공산주의야말로 지속적으로 준엄한 평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욕망을 제거하지 않는 ‘보편적 단독성의 철학’이다. 인민의 주권적 권위는 법보다 우위에 있지만, 현실의 모든 상황은 불변하는 사건으로 종결되기보다 주체의 창조적 개입에 의해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며, 이러한 ‘주체의 충실성’은 사도 바울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상응한다.

조르조 아감벤의 메시아적 시간과 분할적 주체    아감벤에게 혁명적 시간을 가진 진정한 유물론자는 무한한 선형적인 시간 속에서 연속적인 진보라는 허약한 가상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바울의 조작적이고 변용적이며 총괄적인 메시아적 시간 이해(kairos)를 차용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고향인 ‘향유의 시간’을 지금-여기서 매순간 회상함으로서 억압받는 자의 혁명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바울의 메시아적인 ‘남은 자’는 단순히 배제당한 자가 아니라 주권권력에 포획되어 ‘예외상태’로 존재하는 ‘벌거벗은 생명’이면서, 동시에 주권권력 하의 보편과 특수의 이분법적 구분을 거짓으로 폭로하고 비활성화시켜 수행불가능하게 만드는 아나키적이고 정치적인 ‘잔여적 주체’다. “신학은 정치학이다”라는 말은 바울의 교리 자체가 정치적인 것을 표상하기에 신학의 내적 분석을 통해 정치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사유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며, 성자가 초월적 신의 통치를 세계 창조와 연결하면서 세계 내에서 대리 통치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삼위일체 신학 자체가 세계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하나의 총체적인 정치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경륜 신학’은 예외상태를 통한 외재적 통치방식인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달리 외적인 권력을 자발적으로 내재화하는 통치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과 전투적 사랑    쇠퇴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기독교적 경험을 통해 전복적 생기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지젝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변증법을 통해 구체제와 새로운 과업 사이에 혁명적 시간을 사유하고 행동했던 혁명적 투사였다고 말한다. ‘신의 자기포기’(케노시스)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신을 신으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균열이며, 이는 단순한 중립적 분열이 아니라 진정한 해방적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전투적 자기 갱신 자체다. 메시아적 시간은 궁극적으로 역사의 ‘객관적’ 흐름으로 환원될 수 없는 주체의 결단과 개입을 통해 사건의 역사를 내면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진정한 혁명은 언제나 긴박한 ‘절대적 현재’ 속에서 발생한다. 사도 바울의 세계는 특수한 정체성을 내세우는 다수의 집단이 아닌 무조건적 보편주의에 의거하여 구축되는 하나의 투쟁 집체로 이루어지며, 전지구적 질서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고 있지 않은 ‘잔여적 존재’야말로 진정한 보편성을 직접적으로 구현하는 “근본적 보편성의 잔여적 행위자”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불완전한 존재를 신의 지위로 격상시키는(보편화하는) 투쟁이며, 우리는 이러한 전투적 사랑을 통해서만 실재하는 타자에 도달할 수 있다.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과 법 너머의 정의    바울이 말하는 ‘신적 정의’는 율법과 구별되며 율법보다 우선하는 법 이전의 정의로, 법의 규칙성에 균열을 내는 메시아의 시간성과 서사화에 의해 구현된다. 율법은 정의를 생산할 능력이 없지만 정의의 기획과 약속을 내포하며 정의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은 ‘도래할 민주주의’를 의미하고, 이는 두렵고 낯설게 도래하는 근원적인 타자에 의해 현재의 주권질서가 교란되는 ‘탈구축’(deconstruction)을 통해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이질적인 것들이 함께 유지되고 연결되는 ‘정의’를 도입하라는 약속이자 명령을 뜻한다. 모든 법이 가지는 끊임없는 보복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탈구축’(용서/환대)밖에 없으며, 개별적인 법의 특수성 너머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법인 ‘환대의 법’이야말로 선물로서의 ‘정의’로 가는 길이다. 또한 미래와 심판의 종말론적 차원을 가지는 ‘정의’는 모든 안정적인 것에 동요를 일으키고 불일치를 만들어냄으로서 ‘난민’과 같이 새로운 권리를 가져야 할 존재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타자적인 자는 일정한 공동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이질적인 것이 없는 순수 주체는 불가능하다.

 

개인적 단상

1. 저자는 “바울을 자신들의 철학을 위한 하나의 사례로 사용하는 현대철학자들의 핵심적인 논지를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내게는 이 책을 읽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고, 이 글에 담은 개인적 이해와 요약도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주로 이 분야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내 지적인 무능 탓이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현대철학자들이 워낙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저자들이라는 사실도 한몫을 했으리라고 추측해 본다. 어쨌든 이 분야에 대해 겨우 명암만 분간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내 안목이 이 책을 읽은 후로 희미하게 형체를 분간할 정도까지는 향상된 것 같아 기쁘다. 이에 더해 이미 여러 권 사서 서가에 쌓아 놓은 이 철학자들의 저서를 좀 더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졌으니, 저자의 집필 목적이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일부나마 달성된 셈이다. 

2. 저자는 바울의 신학적 주장(복음)을 다룰 때 그의 유대적 조건(특수성)과 제국적 조건(보편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의 글은 문명사적이고 정치적인 진술이 선교적이고 목회적인 진술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교리적 바울’에만 집중하다 보면 ‘정치적 바울’을 포함한 바울 서신의 다채로운 면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서가 문화적 ‘고전’의 위상을 점하고 있는 서구와 달리 주로 종교적 ‘경전’으로만 성서를 접해 왔던 우리에게, 특히 ‘오직 믿음’이라는 고전적 프로테스탄트의 바울 이해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적 진술이 빠진 ‘문명사적 지식인 바울’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바울’을 상상하는 일은 사실 매우 어렵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시원한 해답은 “성서의 '소유권'을 논하거나 ‘성서는 누구의 것인가?’ 라고 묻는 것은 그 자체로 주제넘은 일이자 신성모독 행위이며, 오늘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전 교파 및 ‘비신앙의 눈으로’ 성서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는 성서의 '일시적인 소유자'이자 '종신 세입자'일 뿐“이라는 교회사가 야로슬라브 펠리칸의 일갈이 아닐까? 

3. 이 철학자들의 다양한 생각 중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메시아가 파국적 현실의 잔해더미 속에서 과거 억압받은 자들의 전통을 발굴해 기억하고 애도하는 행위를 통해 도래한다는 벤야민의 통찰이었다. “위대한 문학이란 망각 속에 묻혀 있는 숱한 희생자들을 역사 속으로 불러내어 그들을 다시 ‘기억’해주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고통과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를 지내주는 애도의 행위”라고 강조한 임철규 교수의 말과도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는 ‘역사전쟁’ 혹은 ‘기억의 정치’야말로 메시아의 도래를 앞당겨 자신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이루려는 종말론적 행위인 셈이다. 과연 우리는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우리는 누구를 기억하고 어떤 과거를 소환하며, 그로부터 어떤 미래를 꿈꾸며 만들어가고 있는가? 하워드 진의 말마따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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