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주 안에 서라
[이택환] 주 안에 서라
  • 이택환
  • 승인 2019.03.17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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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빌립보서 3:17~4:1
고대 빌립보의 로마 유적지 아고라
고대 빌립보의 로마 유적지 아고라 ⓒ김동문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바울이 아무리 훌륭한 사도라 해도, 스스로 “나를 본받으라” 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유명한 중세 기독교 고전 가운데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있지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헛된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자는 권면이지, 저자 토마스 아켐피스가 자신을 본받으라는 게 아닙니다. 또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도 원제가 “Nachfolge”, 영어로 ‘succession’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가자는 것이지, 본회퍼의 뒤를 따라가자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진짜 교만한 사람이라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을까요? 그러고 보니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 처음이 아닙니다. 고전 4:16에서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구요, 고전 11:1에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했습니다.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 해도, 세 번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바울이 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계몽주의 이후 세계 신학계에서는 바울이 단지 교만한 사람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몹쓸 인간 취급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가령 니체는 기독교의 창시자가 예수가 아닌 바울이었다고 보고, 그가 예수를 교회의 도그마로 왜곡한 장본인이라고 비난합니다.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빌리엄 브레데 역시 바울이 기독교를 창시했다고 보는데, 그는 바울이 말하는 예수는 역사적 예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단지 당시 헬라의 구원자 신화를 나사렛 예수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말합니다(김세윤 바울신학강의). 한편 불트만은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적 예수에 대해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바울이 선포한 신앙의 그리스도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가 가야할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지요.

문동환, 예수냐 바울이냐, 삼인, 2015년
문동환, 예수냐 바울이냐, 삼인, 2015년

얼마 전 고인이 되신 문동환 목사님의 책 <예수냐 바울이냐>만 해도, 제목이 바울이 예수의 길에서 벗어난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문동환 목사는 기독교가 지난 2000년 동안 바울신학을 추종하면서, 예수님이 창출한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왜곡하고 오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가 바울이 주장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서 빠져나올 것을 촉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메시아 사상은 기원전 11세기에 세워진 다윗왕국의 수호신을 인류의 신으로 믿는 유대 민족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한편 옥성호의 <야고보를 찾아서>를 보면, 바울은 단지 예수님을 환상 속에서 만났을 뿐인데, 예수님과 실제로 함께 지낸 사도들보다 우월함을 드러내려고, 헬라 이원론을 교회에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은 연장자인 베드로도 우습게 여기지요. 성찬식도 바울의 작품이라는데, 예수님과 사도들은 원래 유대인이므로 율법이 금하는 피를 먹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회의에서도 이방인들에게 목매어 죽인 짐승의 피를 멀리하라고 했다는 것이고요. 하지만 이 규정을 지키면서 이방선교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 바울이, 교묘하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성찬예식을 창안해 교회에 널리 전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설득력을 급속히 잃어가는 시대에, 점차 이런 생각들이 널리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그동안 교회의 가르침에 속았다는 것이지요. 단지 창조과학처럼 성경을 잘못 가르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성경 자체가 온갖 거짓과 협잡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서로 싸우고, 사도들과 바울이 다투고, 복음서와 서신서가 충돌하고, 신약과 구약, 율법과 복음이 원수처럼 서로 으르렁댄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소위 역사비평학이라는 성경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이 극단으로 나아갈 때 생기는 부작용으로 보입니다.

일찍이 칼 바르트는 “만일 내가 역사비평학적 방법과 옛 성서영감론,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입장이라면, 단연코 나는 후자를 골라잡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로마서강해 1판 서문). 우리가 아는 한, 바르트는 누구보다 성서비평학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문자주의/근본주의자가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그가 말하는 것은 역사비평학이 쓸모없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소위 설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설명에만 머물러 있었던, 당시 역사비평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지요(로마서강해 2판 서문). 저는 오늘날 성경에 온갖 거짓과 협잡이 난무한다는 식의 해석도 그런 예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칼 바르트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회의적인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그동안 속았다며, 교회와 신앙을 떠나는 것, 또 하나는 교회에 의해 왜곡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원래의 오리지널한 예수, 오염되지 않은 그리스도의 뜻(?)을 좇아 소위 슈바이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슈바이처처럼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아프리카로 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그냥 원래 일을 하면서, 노숙자를 돌보고 가난한 사람들 먹이는 봉사의 삶을 살아야겠지요. 다 좋은데 단, 자신의 길을 걷지 않는 낡은 교회와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면서 하겠지요.

그렇다면 바울은 과연 남달리 교만한 사람이라서 오늘 본문에서 주제넘게 “나를 본받으라!” 고 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교만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은 앞의 빌 3:10-16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그 부분을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본받고자 애씁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고, 고난 없는 영광이 없다는 것을 그가 정확히 알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부활의 길을 이미 얻은 것이 아니고,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혀, 그것을 붙잡으려고 지금도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런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떤 교만한 자들처럼, 자신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충분히 본받았고, 그래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도 참여했으며, 또 그렇게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에 벌써 통달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절대로 그런 교만한 자들이 되지 말 것을 지금 눈물로 호소하는데, 18절입니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은 단지 조용히 눈물만 흘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호소하고 있어요(클라이오). 왜냐하면 이미 빌립보교회 여러 사람들이 바울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십자가와 정 반대의 길로 가는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빌립보서 3장 앞부분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요구했던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과, 추종자로 보입니다. 3장 2절에서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지요.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개’라는 표현이, 지나친 표현이긴 해요. 하지만 그들은 복음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길을 막고,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그들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몸을 상해하는 일, 곧 할례였지요(카타토메, 절단).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할례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둘째는 할례 받은 이방인 그리스도인, 셋째가 할례 없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그들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자신의 육체를 더 신뢰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입니다. 왜냐하면 섬기는 신이 하나님이 아닌 배, 즉 자신의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광은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라,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그들이 가리고자 하는 할례 받은 성기를 뜻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을 그들이 자신의 부끄러운 성기로 바꾼 것이지요. 그들의 관심은 오직 땅의 것에 대한 생각뿐입니다. 즉, 할례(인종), 성별, 재산, 학벌, 출신지 등과 같은 어떤 가시적인 자랑거리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누가 더 높으나 누가 더 힘세냐를 따지는 것이지요. 가만히 보면 오늘날 교단 총회, 노회,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고 바울이 말합니다. 20절,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나중에 죽어서 천국가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가령, 한국에 살고 있는 미국 국적의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에게 미국 시민권이 있다는 의미가 단지, 그가 죽어서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죽어서만이 아니라 살아서도 미국인이고, 사실 그가 한국에 있지만, 매일 미국의 이익을 위해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의미도 그와 같습니다. 게다가 지금 이곳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제한된 특정 영역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영역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아갑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확장되도록 애를 쓰면서 말이지요. 만약 하나님 나라 가치관이 땅의 가치관에 의해 짓밟히면, 분투하면서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간접으로 임하실 것을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땅의 가치관은 가시적인 자랑거리로 사람을 차별하고 줄 세우는 것입니다(십자가의 원수로 가는 길). 하나님 나라 가치관은 그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까지도 한 마음 한 뜻을 가진 형제자매가 되게 하는 것이지요(십자가를 따라가는 길). 우리가 후자의 길을 따를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1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가 세상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 행할 때 마침내 구원, 즉 예수님의 영광 몸의 형체와 같은 부활의 몸을 우리가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완성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본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 안에 선 자인가? 이미 얻은 것도 아니고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지만, 오직 우리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혀, 오늘도 그분의 나라의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그리스도인, 그들이 바로 주 안에 선자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주 안에 굳게 선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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