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욱] 목회자라면 반드시 정독하여야 할 책
[정한욱] 목회자라면 반드시 정독하여야 할 책
  • 정한욱
  • 승인 2019.03.16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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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2017년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2017년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을 연구하는 학자인 고려대 김승섭 교수가 펴낸 책이다. 지난 몇 년간 사회적 상처가 어떻게 인간의 몸을 병들게 하는지에 대한 논문을 읽고, 소방공무원 · 세월호 생존학생 · 성소수자 ·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만나 그들의 건강에 대해 연구하며 쓴 글들을 모았다. 저자는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으며,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소득이 없는 노인이나,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많이 아프고 더 일찍 죽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의료 기술의 발전뿐 아니라, 인간의 몸과 건강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와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이 어디까지인지에 관한 고민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인상적인 책의 요지를 요약하고 개인적 단상을 덧붙이도록 한다.

말하지 못한 상처, 기억하는 몸   우리가 사회 속에서 겪는 차별과 같은 사회적 폭력은 몸에 새겨져 다양한 질병의 원인이 되며 우리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준다. 사회적 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은 종종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경험이 차별이었는지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반드시 기억한다. 사회역학은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병으로 남긴 상처를 해독하고,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의 그물망’을 만드는 ‘질병의 사회적, 정치적 원인’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 병리적 변화는 항상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상호작용하며 나타나지만, 병원에 찾아오는 개개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병원의 임상진료 과정에서는 환자 개개인의 몸에 새겨진 사회구조적 원인이나 현상 너머에서 작동하는 정치경제적 구조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건강은 인권을 지켜내고 정치 · 경제적인 기회를 보장받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기에,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다.

질병 권하는 일터, 함께 수선하려면   쌍용차 해고노동자 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사람들의 비율은 전쟁포로로 잡혔던 사람과 같은 50.5%에 달했으며, 그중 28명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실업자의 재취업을 위한 실질적 지원이 없고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공적 안전망이 취약한 한국 사회에서 해고는 곧 '살인’이 될 수 있으며,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고용불안은 삶을 뿌리째 흔드는 위협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해고의 불안으로 아파도 쉬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건강 악화로 인한 생산성 감소의 부담을 약자인 하청업체에게 넘기고, 하청업체는 더 약자인 노동자 개인에게 그 부담을 떠넘기는 지극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위험도가 높은 작업 역시 국내 협력업체에 하청으로 맡기거나, 노동력이 저렴하고 작업장내 규제가 적은 해외 지역에 공장을 세우는 두 가지 형태의 외주화를 통해 그 위험을 가장 약한 이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해고로 인한 고통을 홀로 감내하도록 방치하지 않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책입안자의 역할이자 의무이며, 진실의 편에서 약자와 함께 싸웠던 많은 이들이 그랬듯 누군가는 그들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끝과 시작, 슬픔이 길이 되려면 I  - 세월호   세월호 참사를 우회하고는 우리 다음 세대가 살아가야 할 안전한 대한민국은 불가능하며, 세월호 참사마저 개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면 우리에게 공동체라 불리는 무엇이 영영 사라져버릴 수 있다.  외상 후 트라우마는 그 고통을 초래한 사회적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때 더욱 확대 재생산되며, 세월호의 침몰 후 그 사건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해석되고 그 원인을 밝히고자 했던 과정은 계속되는 트라우마의 연속이었다. 세월호 참사의 생존자들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와 관련된 의학적 치료는 분명히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한국사회의 온갖 모순들이 집약된 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한 트라우마가 개인적 수준의 치료‘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개인의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트라우마에 대한 인식 공유를 통해, 명예회복- 보상-처벌을 거쳐 사회관계 회복개선”으로 나아가는 사회적 치유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끝과 시작, 슬픔이 길이 되려면 II  - 동성애    동성애자를 아프게 하는 것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동성애 혐오를 조장하는 사회이며, 동성애가 HIV/AIDS의 원인인 것이 아니라 동성애 혐오와 차별이 HIV/AIDS 유병율을 증가시킨다. HIV/AIDS 예방과 관리에 있어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은 더 이상 개입해서 바꿀 수 있는 위험요인이 아니라 연령, 인종, 성별과 같은 사회인구학적 인자로 간주되며, 동성애에 관한 모든 논의는 동성애가 치료받을 질병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하는 성적 지향이고 HIV 감염은 바이러스가 원인인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이라는 과학적 사실 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무리 우월한 이론을 가져와도 혐오는 혐오이고 어떤 낙인을 갖다 붙여도 사랑은 사랑이며, 인간의 가치는 성적 지향이 아니라 얼마만큼 상대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끝과 시작, 슬픔이 길이 되려면 III  - 이민자   한국에서 가장 거대한 종교가 단일민족 신화에 기초한 민족주의이고, 그 종교의 교인이 될 수 없는 이들은 엄연한 한국사람이면서도 동시에 한국 사람이 아닌 경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뇌는 물리적 폭력과 사회적 따돌림을 같은 부위에서 인식하며, 이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발언이 그들을 물리적으로 폭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국사회의 구성원이 된 이민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은 과연 자신들이 세계화 시대의 구성원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되묻고, 자신들 역시 한반도만 벗어나면 소수 인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사회의 인권수준은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건강한 존재들   제2의 가습기 참사를 막으려면 위험을 바라보는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하며, ‘경제 활성화’를 이유로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규제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확신,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함께해줄 것이라는 확신과 같은 공동체의 ‘사회심리학적 요인’은 질병의 발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는 더 많이 연결되어 있을수록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살며, 개개인이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아름다운 사회란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하는 사회다.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꿈을 펼치기를 권장하고 경쟁이 모든 사회구성의 기본 논리라고 주장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다.

 

개인적 단상

1. 상식과 도덕성을 지니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인 ‘인권’의 중요성에 공감하는 독자라면 저자의 결론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에서 저자가 내린 ‘결론’뿐 아니라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경험이나 직관 또는 종교적 도그마가 아닌 잘 고안되고 철저히 데이터에 기반을 둔 과학적 연구로부터 자신의 결론을 도출한다. 이러한 저자의 태도는 과학자가 현상에 접근하고 데이터를 해석하며 결론을 내리는 일련의 과정에서 ‘과학적 합리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준다. 물론 과학은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거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키’가 아니다. 저자도 말하고 있듯 과학적 지식의 생산 과정은 가끔 연구자의 편견이나 비윤리적 행위를 통해 심각하게 왜곡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과학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보이면서도 정작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무지한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상적인’ 과학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며 해답을 찾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과학이 내리는 결론이 때로 완고한 도그마의 언어보다 기독교의 정신에 얼마나 더 잘 부합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인, 특히 목회자라면 반드시 정독하시길 강력히 권유한다.

2.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보니, 드물게 환자의 몸과 마음에서 전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사회적 낙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임상진료를 통해 환자 개개인의 몸에 새겨진 사회구조적 원인이나 현상 너머에서 작동하는 정치경제적 구조와 역사까지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는 저자의 지적에 깊이 공감한다. 훌륭한 임상가가 된다고 해서 의료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전문가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질병의 ‘사회 정치적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임상가가 가진 것과는 전혀 다른 눈과 도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리라. 바라기는 이 시간에도 진료실에서 환자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동료 선생님들이 거시적이고 대승적인 태도로 ‘사회역학’같은 인접 분야나 환자를 포함한 다양한 의료당사자들의 생각과 주장에 더 진지하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소의치병(小醫治病) 중의치인(中醫治人) 대의치국(大醫治國)이라는 옛 성현들의 정신에 따라 병 뿐 아니라 사람과 사회까지 치료하는 더 크고 훌륭한 의사들로 살아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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