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자유는 신뢰의 열매
[곽건용] 자유는 신뢰의 열매
  • 곽건용
  • 승인 2019.03.15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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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11(레위기 25:10 고린도전서 9:19 갈라디아 5:1)

주입된 하느님의 모습, 복종을 강제하는 하느님

오늘은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시리즈 설교 열한 번째이고 네 번째 소주제 ‘강제의 하느님에서 자유의 하느님으로’ 두 번째 설교가 되겠습니다. 이 소주제 설교는 오늘로 끝납니다. 지난 주일에 했던 얘기를 잠시 요약하겠습니다. 세상에 강제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데 유독 강제와 그 결과인 복종 또는 순종이 이상하리만큼 쉽게 용인 되는 영역이 종교입니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사실 기독교는 예외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복종 또는 순종을 바람직한 미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사람이 누군가가 부과하는 강제를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강제하는 존재가 가진 힘과 권력에 눌리기 때문이고. 둘째는 강제하는 존재에 어떤 의미로든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느님과 신자들의 관계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이 전지전능하다고 믿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하느님이 하시는 일로 믿기도 하지요. 우리는 때로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신뢰하고 복종하는 것이 신앙인의 마땅한 자세라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배운 하느님은 뭔가를 못 하게 금하는 분이고 정해진 일정한 선을 넘으면 즉각 이를 저지하는 분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 덕분에 죄에서 해방됐다고 믿는다면서도 늘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습니다. 혹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지 않나 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게 늘 조심하며 살라고 배웠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는 하느님이고 강제하는 하느님이며 법을 제정해 놓고 그걸 어기면 징벌하는 무서운 하느님이었습니다. 공포와 징벌의 하느님이었던 겁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원죄’ 교리가 깔려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어거스틴, 유아세례, 원죄 등 지난 주일에 했던 얘기를 지금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이와는 달리 생각하고 믿을 수도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무조건, 매사에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믿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루 24시간 내내 ‘예수님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셨을까?’를 물으며 살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 그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기원후 1세기 초에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의 갈릴리 태생으로서 30여 년의 생애를 사는 동안 그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시대적 제약을 초월하는 초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어떤 면에서는 시대적 제약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예를 들자면 여럿 들 수 있지만 이는 여러분도 이해하고 동의하실 터이므로 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렘브란트
렘브란트, 탕자의 귀가 (1661~1669)

아버지 것이 자기 것인지 모르고 살았던 큰 아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시대적 제약을 훨씬 뛰어넘는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놀라운 정도로 그 시대를 초월합니다. 지금 21세기의 기준으로 봐도 놀라울 정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믿음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지 못합니다. 정규교육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이상 어떤 근거를 갖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당시 유대교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예수님의 믿음은 유대교 권력자들에게는 탐탁지 않았지만 일반 대중은 놀라면서도 적극적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인 믿음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예를 한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이른바 ‘탕자의 비유’가 전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작은 아들이 유산을 미리 받아 집을 나가 먼 데 가서 탕진했습니다. ‘유산’은 부모가 죽어야 자녀가 받을 수 있습니다. 유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산을 당겨 달라는 작은 아들은 죽지도 않은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한 셈입니다. 참으로 나쁜 아들 아닙니까. 그는 우리 예상대로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돼지를 쳤다고 했습니다. 돼지는 알다시피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짐승들 중 하나입니다. 그가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빠졌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한편 아버지는 그렇게 못되게 하고 집을 나간 아들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가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알아보고 부둥켜안고 씻기고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그를 위해 잔치를 벌입니다.

여기서 비유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오늘 하려는 얘기는 탕자 작은 아들이 아니라 큰 아들 얘기입니다. 큰 아들이 밭에서 일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 풍악소리가 나는 걸 듣습니다. 뭔 일인가 알아보니 아버지가 동생이 돌아왔다고 잔치를 벌인다는 게 아닙니까. 그는 이 얘길 듣자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아버지가 나와서 달래니까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그러니까 ‘복종’했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아버지에게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한 큰 아들을 위해서 그의 소원대로 염소라도 좀 잡아 주지 왜 그러지 않아서 이렇게 불평을 하게 만드나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주목하는 대목은 이에 대한 아버지의 말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큰 아들의 것이랍니다! 아들은 늘 아버지와 함께 있으니 아버지의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랍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걸 모릅니다! 그게 자기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자기 것인지 몰랐다는 겁니다.

 

본래는 모두 자유로웠다

아버지의 이 말이 제 머리를 쾅 하고 세차게 때렸습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당신 것이 곧 우리 것이라고 다 내주셨는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그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복종하는 길만이 하느님을 믿고 사는 길이라고 여기고 큰 아들처럼 우직하게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닌가 말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아, 우리는 왜 지금껏 이걸 모르고 살아왔을까요. 저는 깊은 후회와 회한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아, 하느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야 이 녀석아, 내 것이 전부 네 것이라고 꼭 말을 해줘야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성서에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얘기가 많습니다. 저는 왜 그것들이 이해하기 어려운지 생각해봤습니다. 왜 우리는 그 얘기들을 이해하지 못할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하느님은 명령하고 우리는 복종하고 하느님이 금지하면 우리는 그걸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하지 말아야 하는 관계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 생각만 바꾸면 그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서 세 구절을 읽었습니다. 레위기 25장에는 희년법 규정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열한 지파가 지파 별로, 그리고 그 아래에는 각 가족 별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열두 지파 중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않고 열한 지파에 흩어져 살면서 제사를 주관하고 토라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습니다. 십일조는 열한 지파가 레위 지파의 생계를 위해 냈던 일종의 세금 같은 것이었습니다. 열한 지파가 분배받은 땅을 성서는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부르고 사고파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마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땅과 하늘과 물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백인들이 그들에게 와서 땅을 팔라고 했을 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땅을 사고 파냐고, 어떻게 푸른 하늘을 사고 파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살다 보니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도 다른 가문에 넘겨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흉년이나 자연재해 등의 이유로 부득이 물려받은 땅을 다른 가문에 넘겨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고 또 빚 때문에 다른 가문의 집에서 종노릇해야 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오늘 읽은 희년법은 이런 경우에 대한 규정입니다. 칠 년 만에 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다음 해, 곧 오십 년째 되는 해는 희년으로서 그 해에는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빚 때문에 차압한 땅도 돌려주고 빚 때문에 노예가 된 동족도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해방시켜 주는 것이 희년법입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법 아닙니까. 어떻게 빚을 조건 없이 탕감해주겠습니까. 빚 때문에 저당 잡은 땅을 어떻게 조건 없이 돌려주나 말입니다. 빚 때문에 노예가 됐던 사람 역시 아무 조건 없이 풀어줄 수 있는가 말입니다. 이는 곧 빚 때문에 왜곡됐던 관계를 ‘본래’대로 회복하라는 겁니다. 살면서 우여곡절이 있어 불평등한 관계에 놓일 수도 있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았으니 때가 되면 모든 걸 본래대로 회복시키라는 겁니다. 왜? 하느님의 백성의 본래 상태는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자라지 않고 있을 건가

그 다음은 고린도전서 9장입니다. 여기에는 음식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의 눈으로 보면 많은 제물들이 이교신들에게 바쳐졌던 겁니다. 이렇게 바쳐진 제물(고기)은 제사장들의 몫이었는데 제사장과 그 가족들이 어떻게 그 많은 고기를 소비하겠습니까. 결국 그것 중 대부분은 시장에 매물로 풀렸는데 시장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라고 표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로마제국 안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과 유대교의 가치에 동조하는 이방인들(이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불렸습니다)도 이방신에게 바쳐진 고기를 사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유대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그 고기는 우상에세 바쳐진 제물이었으므로 먹어서는 안 됐습니다. 하지만 표기가 없는 이상 그게 제물이었는지 아닌지 식별할 수 없는 게 문제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이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배운 사람들에게 고기를 사먹는 게 께름칙한 일이 되어 버렸던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기를 안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거리끼지 말고 어떤 고기든 사먹어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봐야 음식일 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바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만 믿음이 약해서 그대가 그런 고기를 먹는 걸 보고 시험에 빠질 사람들을 위해서 삼가는 게 좋다고 충고했습니다. 철저하게 전통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유대인이나 표피적 유대교 신앙에 머무르고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유로운 행위가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삼가라는 겁니다.

저는 이 주장에 기본적으로는 동의합니다. 자기는 자유롭게 뭐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유 행사를 자제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른 면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른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렇게 믿음이 약한 대로 있어도 되는 겁니까? 신앙이 미성숙한 채 머물러 있는 것은 괜찮은가 말입니다. 그 사람도 자라야 하지 않습니까.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는 자리에 머무는 것은 괜찮은가 말입니다. 그렇지 않지요. 자유로운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 누려야 할 자유를 언제까지 유보해야 하는가 말입니다. 제가 10대에 교회 다닐 때도 기독교인이 술 담배를 해도 되는지를 두고 설왕설래했습니다. 그게 지금부터 40여 년 전인데 아직껏 한국교회에서는 그 문제가 중요한 신앙의 문제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런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존중과 신뢰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알기에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하는 만큼 하느님도 우리를 신뢰하고 계심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외출 나온 죄수가 아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라고 선언했습니다. 고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보면 제 기억에 신 선생님의 부모 중 한 분이 돌아가셔서 장례식 참석을 위해 외출 나온 얘기가 있습니다. 물론 그는 무기수였으므로 장례 수에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때 신 선생님처럼 외출 나온 죄수가 아닙니다. 지금은 잠시 자유를 누리지만 결국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하는 죄수가 아닙니다. 줄이 아무리 길어도 목에 줄을 매고 있는 개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긴 줄에 묶여 있는 개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하느님과 우리 인간이 정해진 양의 자유를 나눠 갖는다고 믿었습니다. 한 장의 파이를 하느님과 우리가 나눠 먹는다고 여겼던 겁니다. 하느님의 몫이 커지면 우리 몫이 작아지고 반대로 우리가 더 큰 자유를 누리면 하느님의 자유가 줄어든다고 여겼습니다. 근대의 지식인들 역시 그렇게 믿고 사람의 자유를 확대하려면 하느님의 자유를 축소해야 했습니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자유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따위는 필요 없다며 신을 죽여 버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딜리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사람은 한 장의 파이를 나눠 먹어야 하는 사이가 아니라 이인삼각으로 함께 걸어가는 관계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인삼각 관계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얘기했습니다. 운동회에서 많이 했던 이인삼각 경기, 곧 두 사람이 한쪽 다리를 끈으로 묶고 세 개의 다리로 협동해서 걷는 경기 말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한편의 자유가 커지면 다른 편의 자유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자유를 누려도 둘이 같이 누리고 종이 되어도 같이 종이 되는 관계가 바로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라는 겁니다.

이런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존중과 신뢰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알기에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하는 만큼 하느님도 우리를 신뢰하고 계심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 못지않게 여러분 자신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신뢰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인의 자유는 이와 같은 상호신뢰, 상호존중, 상호의존의 바탕 위에 서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강제의 하느님에서 자유의 하느님으로’ 주제의 설교는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 주일부터는 ‘개인의 하느님에서 공동체의 하느님으로’라는 주제로 설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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