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김영웅의책과일상]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 김영웅
  • 승인 2019.03.14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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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하우어워스, 한나의 아이, IVP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초월일까, 독선일까, 아니면 그저 무관심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 그런 사람은 교만하다든지, 반항적이라든지, 아니면 무책임하다는 말을 각 진영으로부터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런 자세가 진리를 향한 것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특히 기독교 안에 있는 교파들과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예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고, 그럴 의도조차 없으셨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전해온 약속의 성취요,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께서 죄와 악으로 물든 창조세계를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하신, 열방에 복을 주시는 구원 계획의 완성이시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인정하는 그 동일한 복음을 신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특히 루터로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생겨난 이후, 동일하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여러 교파가 생겨났고, 서로 분쟁까지도 일으키며 여러 조각, 여러 모양으로 분리되었다 (이 부분에선 교회 일치 운동을 생각해 볼 여지를 남김, 스탠리 하우어워스도 지지하는 입장임).

우리 주위엔 예수님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부분의 초점을 맞추어 개인구원론에 치중하는 우파의 신앙도 있으며, 예수님의 신성에 관련된 부분보다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의 삶의 모습과 자세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님처럼 사는 것만이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자유주의적인 좌파의 신앙도 생겨났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20세기 중 후반에 일어난 이러한 미국 기독교 내부 변화의 산 증인이다).

가톨릭,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성결교, 루터교, 초교파 교회... 이러한 굵직굵직한 이름들 아래는 또 수많은 작은 가지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장로교 합동측에서 교회를 처음 다니기 시작했고 (친구가 사탕 준다는 꼬임에 넘어감, 훗날 그 친구는 교회 떠남, 나만 남음 ㅜㅜ), 집이 이사하면서 성결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다가 (그땐 교단이란 의미도 몰랐을 뿐더러, 집 근처에 있고, 친구들이 많이 다니며, 이단만 아니면 된다는 게 나의 교회 선정 기준이었다), 또다시 이사하면서 감리교 교회도 다녀보고, 순복음 교회도 몇 번 경험해 보고, 침례교 교회도 다녀봤다. 미국에 와선 루터파 교회에도 몇 번 다녀봤고, 남침례교단 소속 교회에도 다녀봤으며,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는 초교파적인 교회도 다녀봤다. 지금은 한국 장로교 통합측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PCUSA 소속 교회를 다닌다. 본의 아니게 여러 교단을 접해봤지만, 솔직히 말해서 각 교단이 왜 다른지, 왜 달라져야만 했는지, 난 그 이유를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두 예수님의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강조하는 부분이 다를 뿐, 모두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을 이야기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그의 책 '한나의 아이'에서 밝힌다. 자기는 어느 교파나 교단에도 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는 자신이 개신교도이며 감리교 소속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조각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단 그것들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 의미를 둔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답 없는 시대에 살아남는 법이라고까지 말한다. 책의 마지막 이야기에서도 자신이 '한나의 아이'를 쓰면서 배운 것은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라고 밝힌다. 그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냐며 감탄하면서 말이다.

그는 또한 신학자로서 자신을 규정하면서도, 신학이 할 일은, 인생의 복잡성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려면 하나님에 대해 말해주는 단어들이 필요함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학자들이 그런 단어들을 쓰기 두려워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긴다면 그들의 소명을 배신하는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임과 동시에 인생의 복잡성이라고 하면서, 근대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발언'과 '인생의 복잡성'을 분리하려고 시도한 것에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그 분리 시도의 결과 그들 신학의 핵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되었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정말 필요한지 불분명해진다고 역설하면서 말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윤리학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윤리학이란 신학적 진술의 실천적 특성을 드러내는 학문일 뿐이라고 정의한다. '한나의 아이'가 그의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나는 책을 읽어 내려가며 하우어워스 내면에 자리잡아 가는 신앙의 변화와 성장과정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너무나 솔직 담백하여 (어떻게 보면 신비감 완전 제로), 아무런 군더더기가 없고 가식이 없었다. 그는 특권층에 속하길 거부한다. 그가 신학대학원에 간 이유도 목회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을 좀 더 알고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그 이유였다. 교수가 되거나 학과장이 되거나 총장이 되는 명예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텍사스 플레전트그로브 출신이자 벽돌 쌓는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듯) 생각까지 긍정적으로 승화시켜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회고록은 보통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법인데, '한나의 아이'는 그런 면에선 '정통' 회고록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신의 과거 인생을 온통 친구들과 가족들의 이야기로 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그는 관찰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가짜' 주인공들과 함께 모든 곳에 존재했고, 모든 것을 경험했으며, 모든 것을 종합해냈다. 그 종합은 어떤 이미 유명해진 회고록 저자의 모습이 아니라,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으로 글 읽고 쓰는 걸 좋아하며 어느 진영에도 정치적으로 속하지 아니하며 끝까지 진리를 추구하는 겸손한 신학자의 모습이다.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배우게 되었다는 그의 고백은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선정되기도 했었던 그의 내면세계를 잘 반영하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고백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큰 일을 해내고 그 결과로 인류에 공헌까지 해서 자타가 인정하는 유명인이 되고 난 이후에 하는 영웅담과도 같은 과거 완료형의 간증이 아니라, 그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진지하게 사유하고 하나님에 관한 언어로 일상을 설명해내려는 의지를 가지고 본인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직접 끊임없이 설명해 내고 있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친근한 일상의 간증이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할 수 있었다. 내가 틀린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위로도 받을 수 있었다 (영웅담 간증은 싸구려 자기계발서와 같다고 생각한다). 의심이 생기고 그래서 질문하고 생각하고 답을 구하기 위해 읽고 어느 답이 맞는지 알기 위해 발표와 토의를 경험하는 방법이 결코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날처럼 답 없는 (어쩌면 답이 넘쳐나는) 삶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주 정상적이다. 더  나아가 아주 바람직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난 스탠리 하우어워스 덕분에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점점 되어간다는 것이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일이라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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