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 1905년 여름 이승만은 고종 밀사도 아니고 일진회 대표도 아니었다.
[반론] 1905년 여름 이승만은 고종 밀사도 아니고 일진회 대표도 아니었다.
  • 옥성득
  • 승인 2019.03.0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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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8월 이승만 미국외교활동, 2011년 한겨레신문 왜곡 후 가짜뉴스 확대

8,000명 하와이 한인 대표로 윤병구 목사와 이승만은 태프트 국방장관의 추천서를 가지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미국이 힘써 줄 것을 청원하는 문서를 개인 자격으로 전달했다. 당시 워싱턴 디시에 한국 공사관(김윤정 서리공사)이 있었기 때문에 루즈벨트는 두 사람의 문서를 개인 문서로 간주하고 공사관을 거쳐 공식적으로 올리라고 말했다. 이는 핑계에 불과했다. 이미 태프트 장관이 일본 외무상 가츠라와 밀약을 맺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1년 한겨레에서 이승만 외교를 친일로 몰았고, 2012년 정병준 교수가 논문에서 그 왜곡을 일정 수용하자, 이후 이승만의 독립 외교가 어느새 일진회 친일 활동으로 둔갑되었다. 먼저 왜곡 사실을 살펴보고, 이어서 바른 기사들을 통해 사실을 바로 잡아보자.

 

1. <한겨레 신문>이 2011년 이승만 윤병구의 독립 외교 활동을 친일파 일진회 대표로 왜곡

다음 기사는 <한겨레신문>, 2011년 8월 22일자 인터넷 판에 실렸다. 이후 유사한 기사가 SNS를 통해 퍼지고 페이스북이나 온라인 신문 등에 계속 올라오고 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당시 신문 가운데 한 기사만 읽고 이승만이 친일파인 ‘일진회’ 대변인을 자처했으며, 대한제국을 부정하고 반러, 친일 노선을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사실의 왜곡이다. 최소한 몇 개의 다른 유력지를 읽었다면 이런 왜곡 기사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승만 사진도 당시의 젊은 모습이 아닌 노인 때 사진을 올려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이승만 고종 밀사설 깨졌다"
한겨레, 미국 옛 신문보도 발굴
1905년 루스벨트 만나 “일진회 대변인” 자처
대한제국 부정하고 반러·친일 노선 드러내

한겨레가 인용하고 있는 The Stark County Democrat 1905년 8월 8일자 신문 기사를 읽어 보자.

그 요지는 이승만과 윤병구 두 한국인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서 한미 조약에 따라 한국 백성들이 원하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곧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일본과 러시아의 계략을 미국이 막아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두 사람은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있는 고종을 대변하지 않으며, 일진회와 한국의 일반인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루즈벨트는 이들을 잠시 만나는 주었으나 (이미 일본을 한국 식민지화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정식 외교 루트를 이용해서 요청하라며 이들의 비공식 외교를 천대했다.

왜곡 1. 일진회 문제: 이승만 윤병구가 일진회 대변인이었는가? 미국 기자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오해하고 쓴 말이다. 두 사람은 일진회 회원도 아니었고, 일진회가 파송하지도 않았다. 윤병구는 하와이한인회의 공식 대표로 파송되었고, 조지 와싱턴대학교에 다니던 이승만은 한인 학생회(혹은 샌프란시스코 한인회)를 대변하는 비공식 대표로 동행했다. (자세한 사정은 정병준 교수의 아래 논문과 내가 정리한 다른 신문 기사를 보라.) 또 일진회는 一進會이지 위의 기사에 번역된 대로 日進會(Daily Progress Society)가 아니다. 물론 1904년 말-1905년 초 일진회의 성격은 1905년 후반의 일진회와 달리 진보적이고 민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 1907 조지와싱턴대 졸업 앨범

왜곡 2. 이승만의 사진. 어떤 기사를 실을 때 영어 본문은 거의 읽을 수 없도록 해 놓고 이미지만 크게 실으면, 결국 독자는 이미지만 기억에 남게 된다는 점에서, 이 기사는 첫째, 왜곡된 이미지 메이킹을 의도적으로 했다. 최소한 다음과 같은 당시 이승만 사진을 실었어야 했다. 그는 당시 30세였다.

2. 정병준, "1905년 윤병구·이승만의 시오도어 루즈벨트 면담외교의 추진과정과 그 의미," <韓國史硏究> 제157호, 2012.6, 139-190.에서 <한겨레신문> 기사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친일 외교 활동으로 해석했다. 

논문 174쪽에서 인용한 The Stark County Democrat 1905년 8월 8일자 기사 뒷 부분에서, 한국이 러일 양국의 제국주의 맷돌 사이에 끼여 독립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일본의 궤략으로 보호조약을 맺게 되었다는 것을 항의하는 윤병구의 말은 생략하고, 굳이 택하자면 그래도 러시아보다 일본이 주인이 되는 것이 더 낫다는 말과 따라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말만 번역 인용했다. 이 기사를 신뢰하는 것이 첫째 문제이다.

둘째, 그것이 친일 외교 활동인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포츠머스회담은 종전 회담으로 러시아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이 상황에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러시아보다는 일본이 그래도 한국을 위해서는 나았다는 게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것은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지식인이나 민중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협조로 한국이 독립을 보장 받는 것이 하나의 외교 전략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차선책인 일본의 보호(보호국화가 아니라) 속에 한국의 독립을 모색하려고 한 노력을 친일 행위로만 보는 것은 좁은 해석이다. 

아무튼 오하이오의 한 지방 신문 기사가 전한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은 문제이다. 당시 그들의 행동은 여러 신문에 실렸고 하와이 한인들이 보는 영자지에도 실렸다. 이들을 종합적으로 볼 때, The Stark County Democrat 기사의 왜곡이 드러날 것이다.

 

3. 이승만과 윤병구는 일진회 대변인이 아니었다.

아래에서 보겠지만 두 사람이 올린 청원서를 보면 위의 오하이오 신문이 얼마나 오보를 했는지 알 수 있다. 

(1) 뉴욕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 1905년 8월 4일자. 이승만은 개인 자격

오하이오의 The Stark County Democrat보다 나흘 전 뉴욕의 브루클린데일리이글은 두 사람의 외교 활동에 대해서 상세히 보도했다. 이 글에서는 두 사람이 고종의 밀사가 아니며 한국인 일반인을 대변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들은 일본과 러시아에 의해 위태로워진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미국이 일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2) 이들이 개인 자격이었음을 같은 날짜 Washington Post가 확인해 주고 있다. 

(3) 이승만 윤병구가 루즈벨트에게 올린 청원서 , 1905년 7월 12일 작성

여러 신문 기자들이 얻으려고 했던 청원서 원문이 드디어 8월 18일에 공개되었다. 이 원문에는 일진회 일자도 없다. 항일독립 외교였다. 이승만 윤병구는 하와이 한인 대표로 루즈벨트를 만났다. 이는 이후 다른 신문에서도 반복하는 사실이다. 

1905년 8월 18일자 Asbury Park Morning Press(NJ)에 청원서 원문이 실렸다. 다른 신문들도 이 청원서를 보도했다. 전국적으로 알려졌다고 할 수 있다. 

Evening Star, 1905년 8월 18일

(4) NYT도 같은 날짜로 APMP 보도를 인정했다.

(5) 하와이 한인들도 윤병구와 이승만의 항일 독립 외교 운동을 지지하고 칭송했다. 

와싱턴, 뉴욕, 뉴저지 신문들은 모두 이승만 윤병구의 외교 활동을 사실대로 보도했다. 이를 전해 들은 하와이 한인들과 하와이 신문도 두 사람의 노력을 가상히 여겼다. 

Hawaiian Gazett, Oct 21, 1905

 

4. 결론

1905년 7월 12일 하와이 한인회는 윤병구 목사를 워싱턴으로 파송해 한국 독립을 위해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도록 했다. 윤병구 목사는 떠나기 전 하와이에 온 태프트 국방장관을 만나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추천서를 부탁했고, 윤 목사는 그의 편지를 들고 워싱턴으로 갔다. 그곳에서 대통령이 여름 휴가로 롱아릴랜드로 간 것을 알고, 당시 조지워싱턴대학교 학생이던 이승만과 함께 대통령 별장으로 찾아갔다. 

두 사람은 고종이나 한국 정부를 대변하지 않고, 일반 국민들과 하와이 한인 8,000명을 대변하는 자격임을 밝혔다. 그리고 1882년 한미조약(조미수호통사조약) 1조에서 약조한 "만약 타국이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이 있게 되면 일차 조지(照知)를 거친 뒤에 필수상조(相助)하여 잘 조처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한다."에 따라 잘 조처해 줄(exert their good offices) 것을 요청했다. 곧 미국이 러시아와 일본의 식민지화 야욕을 꺾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개인 자격이었고, 이미 루즈벨트는 한국을 일본에 넘겨주는 가츠라-태프트 조약을 추진하고 있었기에 이들의 외교 노력을 외면했다. 루즈벨트는 이어서 고종이 밀사로 파견한 헐버트도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 윤병구의 외교 활동은 을사조약 직전에 이루어진 대단히 중요한 미주 한인의 항일 독립 외교 노력이었다. 대한제국의 황실이 죽을 쑤고, 고관들이 우왕좌왕할 때 하와이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모은 돈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윤병구 목사를 워싱턴에 보내어 독립을 호소하도록 했다. 이승만은 뉴욕까지 윤 목사를 모시고 가서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하려고 했으나, 루즈벨트는 개인 자격을 문제 삼아 외면하고 지연책을 썼다. 남은 일은 언론에 호소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언론에도 이미 친일 기자가 많았다. 그래서 바로 청원서를 공개하지 않고, 한국을 이해해 주는 기자들에게 먼저 공개해 주었다. 미국 언론을 이용해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그것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하와이로 돌아갈 수 없는 윤 목사였고 이승만이었다. 나라가 망하는데, 어찌 한국인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애국적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한겨레신문과 정병준 교수, 여러 글들, 그리고 며칠 전 <드림투게더> 기사까지 이승만을 일진회 회원, 친일 외교의 주역으로 몬 역사 왜곡으로 독자들을 혼란에 빠트린 죄를 인지하고 사과해야 할 것이다. 

참고) [팩트체크] 이승만은 고종황제의 밀사였다?: 오히려 친일단체 일진회의 사절이었다, 2019년 3월 1일 <드림투게더>

참고) 2015년 6월에에 나는 이미 이 문제를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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