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비밀의 편지, 위로의 편지
[김동환] 비밀의 편지, 위로의 편지
  • 김동환
  • 승인 2019.03.03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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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목사의 설교 - 계 19:1~9

1. 계시록에 미래의 일이 담겨있을까?

오늘은 요한계시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요한계시록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뭔가 비밀스러운 이미지가 떠오르죠? 무서운 심판, 천사와 악마 이런 게 떠오를 수도 있고요, 계시록을 잘 이해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좀 어려운 책이기 때문이죠.

마이클 고먼, 새물결플러스, 2014년
마이클 고먼, 새물결플러스, 2014년

예전에 새물결 플러스에서 나온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라는 책을 읽어봤었는데요, 추천하는 책이에요. 단권으로 계시록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책으로는 좋은 것 같아요. 미국적 배경이 많아서 와 닿지 않을 수는 있어요. 한국인 저자가 쓴 책으로는 이필찬 교수님 책을 추천하는데요, 표절논란으로 아쉽게 더 이상 책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신학교 다닐 때 그분 세미나도 가서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너무 아쉽네요.

많은 이단들이 계시록을 가지고 자기들의 사상을 사람들에게 주입하잖아요? 대표적으로 신천지가 있죠, 신천지의 엉터리 성경공부 커리큘럼의 마지막은 계시록이거든요. 신천지 교주를 우상화 만드는 긴 프로젝트의 마지막으로 계시록을 사용하는 거죠. 계시록이 사실은 우상숭배에 대해 저항하는 책인데, 이걸 반대로 사용하는 현실을 보니 좀 아이러니하긴 해요. 이필찬 교수님이 좀 더 활동했으면 좋았겠다 싶었던 건, 그 교수님이 신천지의 잘못된 계시록 해설을 짚어주는 강의를 많이 하셨거든요. 신학교수님 중에서 이단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하시는 분이 별로 없어요. 이단이 무섭잖아요? 몇 안 되는 용감한 분이셨는데, 과거의 책들만 남아있어 아쉬운 마음이 들어요.

이필찬, 새물결플러스, 2015년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라는 책은 미국의 신학교 교수님이 쓴 책인데요, 서문에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요. 좀 예전 일이긴 한데,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여기저기에서 적그리스도가 대통령이 됐다는 글들이 올라왔다는 거예요. 오바마 대통령을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 도 있는데 성경의 언어를 가지고 종교적 판단을 하면 안 되잖아요?

계시록을 가장 바르게 읽지 않는 경우가 항상 이런 거 같아요. 대학로에 살 때 보면 길거리에서 팻말 들고서는 계시록의 구절들을 몇 개 적어서는 세상에 말세가 오고 있다,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세계교회협의회)를 찬성하면 안 된다, 북한과 어떻게 하면 안 된다, 이런 말을 하는 분들도 봤어요. WCC는 전 세계 교회회의 기구인데요, 장로회 통합 교단의 정체성이기도 해요, 그런데 어떤 신학적 노선이나, 정치적 이념을 종교적으로 강화시킬 때 꼭 계시록을 들어서 사용하더라고요.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요? 계시록이란 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질문을 하나 드려볼게요, 요한계시록에 미래의 일이 예언되어 있나요? 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설교 중이니까, Yes, No로 한번 의견만 들어보고 넘어갈게요. 정답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저는 Yes,라고 생각해요. 어떤 미래의 일이 담겨 있는 걸까요? 오늘 읽은 본문이 그 미래의 내용이에요. 정확히는 현재와 미래가 합쳐진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반드시 완성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일들, 그분의 삶과 죽음, 그 피값으로서 산 생명의 일들, 그 구원의 일들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완성될 것이고, 그것을 믿음으로 보는 이들은 오늘 말씀과 같이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설교는 이렇게 끝났네요? 계시록에 담겨있는 미래는 구원의 미래예요. 하나님께서 모든 우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 회복시켜주실 것 그 미래에 대한 이야기예요. 14만 4천 이야기 들어봤죠? 이걸 문자적으로 채우려고 사기 치는 건 신천지고요, 계시록 7장 9절을 읽어드릴게요.

9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4만 4천, 그러니까 이스라엘 열두 지파 곱하기 만이천, 플러스 무한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말이잖아요? 하나님께서 결국에 모든 백성을 살려주실 것을 말하는 예언이에요.

목사님, 그럼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요? 그건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는 거겠죠? 등록교인이냐 아니냐, 성경공부했냐 안했냐, 헌금했냐 안했냐로 구원받은 사람, 못 받을 사람을 구분할 수 없잖아요? 정말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했고, 또 고백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판단하실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좀 목사님 진보적이네요, 이럴지 모르겠는데요, 그건 진짜 진보적인 분을 못 만나봐서 그런 거예요. 계시록에 이런 구원의 완성에 관한 미래 조차 담겨있는 게 아니다고 보는 분들도 있어요, 부활을 실제 사건이 아니라고 보는 분들도 있고요. 이런 분들이 진짜 진보적인 분들이죠. 저는 삼위일체, 이신칭의,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 등 교회의 전통적 논의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입장이에요. 신학 전체의 패러다임으로 보면 보수 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계시록에는 구원의 완성에 관한 미래가 담겨있다고 믿고 있어요!

 

2. 계시록에 담긴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세상을 구원하게 하실 만 큰 사랑이 많으신 분인데, 계시록은 왜 이렇게 무서운 단어들이 많이 나올까요? 달이 떨어지고, 땅이 갈라져서 머가 나오고, 별들이 떨어지고, 이런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나오죠?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이죠, 그 거룩한 분노가 결정적으로 향하는 곳이 있어요, 계시록에 등장하는 수많은 심판의 메시지들이 끝나는 17장에 결국 그 분노가 향하는 자의 정체가 드러나거든요. 바로 음녀예요. 새 번역에는 창녀로 번역되어있고요. 응? 하나님의 분노가 몸을 파는 여자에게 향하다고? 상징적인 표현이에요. 그 여인에게 있는 비밀의 이름이 17장 5절에 드러나요, 바벨론입니다.

바벨론? 기원전 600년 전의 강대국, 이스라엘의 반쪽 남은 유다를 정복했던 그 나라 이름 아닌가요? 계시록 편지가 쓰인 시기는 AD 80~90년쯤이니까 700년 전에 있었던 나라 이름인 거예요. 무슨 일일까요? 암호죠. 퍼즐 같다고 생각하면 돼요. 처음 시작할 때 이야기한 ‘계시록 바르게 읽기’의 저자가 마이클 셔먼 교수인데요, 그분이 프린스턴에서 신학생 시절에 계시록을 설명해준 교수님이 쓴 책이 ‘Breaking the Code’래요, 번역하면 암호 박살? 암호 풀기라고 하면 되겠죠.

유대인의 세계관에서는 이렇게 암호로 소통하는 장르를 묵시라고 해요. 왜 암호로 소통할까요? 전쟁에서는 적에게 안 들키고 싶을 때 암호를 쓰잖아요? 그러니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소통하기 위해 쓰는 고유한 언어인 거죠.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을 받는 상황, 사실 그게 계시록이 쓰일 때의 상황이었고요, 구약시대에도 항상 고난의 시대가 있었죠, 그때마다 사용된 고유한 암호 언어들이 있어요. 그게 계시록에 그대로 사용돼요,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늘 묵상하고 읽는 사람들에게만 통할 수 있는 그런 암호 언어, 그게 신약의 묵시인 거예요.

AD 70년에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게 완전히 정복당해요. 이스라엘이 완강히 저항하다 보니 그만큼 피해가 많았었나 봐요. 그 이후로 이스라엘의 역사에게 가장 아픔의 단어인 바벨론, 그게 로마를 상징하는 언어가 된 거예요. 예수님 시대에는 그렇게 쓰이지 않았던 언어니까, 이런 배경을 알면 '계시록은 굉장히 늦게 쓰인 편지이구나!'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정리하면, ‘심판의 방향은 음녀에게로 가고, 그 음녀는 바벨론인데, 바벨론은 당시에 로마를 뜻하니, 결국 계시록에는 로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담겨있다?’

이렇게 하면 거의 완성입니다. ‘거의’라는 말이 중요해요! 그냥 단순히 로마라고만 하면 또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따지면 이미 로마는 망한 지 오래됐는데 그럼 이 계시록의 메시지는 지금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겠군요? 그게 아니라는 거죠. 당시 로마 문화에 나타나는 반-신앙적 행태들이 악하다고 하는 거예요. 로마 사람을 하나님께서 싫어했을까요? 아니죠, 바울이 선교의 마지막으로 간 곳이 로마잖아요, 로마서라는 편지는 신약성경의 절정이고요. 로마라는 당대 최고의 국가에 드러나는 ‘우상을 만드는 악함’, 그게 문제인 거예요. 다시 말해서 신이 아닌 것을 신으로 만드는 악함, 그걸 성경에서는 죄라고 하는 거고요. 국가적 힘을 얻게 되는 우상의 힘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강제력을 갖게 하죠. 교회를 못 다니게 한다거나,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로마는 기본적으로는 다신론 세계관이라 각 나라의 종교는 인정해줬어요, 다만 최고신은 로마의 신이어야 하는데, 좀 유명한 황제는 사후에 황제를 신으로 모시게 하는 관습이 있었어요. 죽은 황제를 모시는 신전을 만들어서 로마 속국의 사람들은 거기서 예배를 드리게 하는 거예요. 존경을 받아서 사후에 신으로 모셔지는 황제도 있었지만, 성질이 고약해서 살아있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황제로 통치하고 있는데 자기를 신으로 생각해서 신전을 만들고 사람들이 자기를 예배하게 만든 황제도 있었어요. 계시록이 쓰였을 시기로 유력한 시기의 황제가 바로 그런 황제 중의 하나예요.

도미티아누스 황제(Titus Flavius Domitianus, 51~96) 시대였는데요, 요한이 밧모섬으로 유배 중에 지중에 근방의 교회들에게 쓴 편지가 계시록이잖아요? 요한이 섬에 유배자로 갇힌 이유가 우상숭배와 맞서 싸우다 그렇게 되었을 확률이 높아요. 이 요한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요한이냐는 확실하진 않아요. 학자들마다 다르지만, 저는 맞을 확률이 좀 더 높다고 생각해요. 보수적이죠?

 

3. 보수와 진보의 용어 정리

자, 계시록의 세세한 구절에 대한 설명은 다음에 또 계시록 설교를 할 때 해드릴게요,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이 정도 설명만 들어봐도, 대략적인 느낌이 오죠?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 결단할 때 오는 세상의 저항, 공격, 그 공격에 대해 지치고 낙담될 때, 하나님께서 그 우상을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힘, 음녀, 바벨로, 로마로 상징되는 그 힘을 응징하고 결국엔 모든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한 말씀과 행동과 똑같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고 그래서, 계시록이 되는 거고요.

이쯤에서 한 가지 우리가 정리해보아야 할 주제가 있어요. 청년들이 주로 모이는 모임이다 보니, 정치, 경제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잖아요? 계시록을 보더라도 사회에 대한, 정치-경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죠. 그래서 다분히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토론이 모임에 있을 수 있어요. 이때 우리가 가져야 할 한 가지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 있어서 우리는 일치해야 하지만, 그 외의 주제에 대해서는 각자 다양한 생각을 가질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볼게요, 2월 설교에서 우리가 희년을 몇 번 다뤘어요. 구약의 중심 법인데, 땅을 영원히 사고팔 수 없게 만드는 법이죠. 서로 사고팔아도 50년에 한 번은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법이에요. 그래서 사고팔 때는 그 50년에서 남은 기간에 따라 땅값을 매겨서 거래해야 하는 거죠. 오늘날 정치로 따지면, 분배에 가까운 정책이니까 사실 진보진영에서 하는 말과 흡사하죠. 진보, 보수 용어 정리를 하고 싶지만 일단 대체로 그렇게 쓰니까 그냥 쓸게요. 부의 재분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좀 더 맞긴 해요 희년이란 법이요. 하지만 이 희년을 지금 현대 정치, 경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말도 안 되는 말이죠, 불가능해요, 그렇게 하라고 있는 성경구절도 아니고요.

자, 경제 정책으로 따지자면, 좀 더 개인 간, 기업 간의 자유를 지켜주자라는 입장을 보수, 국가가 개입해서 평등하게 조율해주자는 방향을 진보라고 합시다. 구약의 희년은 분배 쪽이니까 성경적인 사람은 진보적인 사람이다, 이 논리가 가능할까요? 아니죠, 신앙은 자유나 평등이냐 한쪽을 택하게 하는 게 아니에요, 경제 정책에서의 보수나 진보는 개인의 선택이죠, 하지만 신앙은 두 진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역할을 줄 수 있는 거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자유를 강조하는 사람, 평등을 강조하는 사람에 따라 그 해법이 조금 달라질 수 있는 거예요. 신앙은 이거다, 이렇게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정치-경제적 입장은 자유이니, 서로의 다른 입장을 존중해주자는 거예요. 사람은 토론으로 생각이 바뀌지 않아요. 주일에 두세 시간 만나는 모임으로 그런 입장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서 페미니즘에 관심 많은 친구가 우리 모임에 왔어요. 그러면 여러분 중에 몇몇이 한국의 페미니즘이 좀 편향되었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 친구를 페미니즘에서 돌아서게 설득할 수 있겠어요? 절대 불가능할 거예요. 신앙공동체에 필요한 건, 그 친구는 어떻게 해서 그런 신념을 갖게 되었는지를 경청해주고, 각자 여러분이 가진 생각을 매너 있게, 신앙 안에서 공유해 주는 거죠. 어떤 신념으로 살아갈지는 각자가 정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신앙적 자유주의 같네요? “예수님 안에서 각자 자유롭게!” 이런 느낌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결국 자기 생각이랑 비슷한 사람과만 어울릴 수밖에 없어요,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전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에요. 예수님의 12제자들처럼 말이죠! 자기랑 친한 사람 중에 나랑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한번 스스로 체크해보세요, 신앙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진단해볼 수 있는 체크리스트라고 생각해요.

 

4. 보이지 않는 악과 싸우고 있는 당신에게

계시록을 해석하는 것도 어렵고요, 오늘 우리의 현실을 해석하는 것도 어렵죠? 어렵게 생각하면 끝도 없지만, 쉽게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계시록은 믿음의 싸움을 하고 있는 신앙인에게 주는 위로의 편지다.” 계시록의 저자 요한이 환상 중에 다음의 말을 받아요, 12장 9절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여라." 그리고 또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다.”

이 말씀이 와 닿는 사람, 위로가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신앙 때문에 섬으로 유배당한 요한처럼 무언가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거예요. 보수냐 진보냐 저는 저는 크게 중요하지 않는 것 같아요. 말이 아니라 무언가 작은 실천을 하고 있는 사람 이어야 해요. 저도 입장은 온건한 진보?^^ 쪽이지만, 워낙 말만 하고 아무 행동도 않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이런 논쟁 자체가 피곤해요. 신학의 세계에서도 약간 진보적인 분들 많이 만나봤는데, 뭐라도 하는 사람은 별로 못 봤어요. 지금은 지쳐서 기대조차 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냥 각자 소신을 가지고 작은 실천을 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아주 작은 일이어도 좋으니까요!

신앙 때문에 오는 어떤 부담감,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할 때 신앙의 반대쪽에 있다고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을 것 아니에요? 구약시대에 바벨론이란 상징어로 표현되는 악, 신약 시대에, 특히 1세기 후반기에 사용되었던 로마라는 상징어. 그렇게 무언가 악이다고 느껴지는 것, 특별히 신이 아닌 것을 신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조정하게 하는 무언가, 우상을 만들어내는 이 시대의 바벨론, 로마가 있을 거예요. 그 대상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계시록에 나오는 오늘 말씀이 위로가 될 거예요. 매일 지고 있는 싸움 같지만, 하나님께서 결국 완성시켜주실 것이라는 신비한 희망을 주니깐요. 사람이 줄 수 있는 희망이 아니라서, 어떤 학문이나 어떤 수련으로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아니라서 신비하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군요!

그런데 아무런 실천도 하지 않고 있고,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어떨까요? 그냥 어려운 책이에요. 요한이 섬에 유배됐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아니면 계시록을 교양 공부 서적 정도로 볼 수 있겠죠, 열심히 탐구하는 거예요, 이 단어는 뭘 말하는 걸까? 이 장은 어떻게 해석해야지? 물론 그것도 좋은 거긴 한데, 계시록의 의도, 방향은 거기에 달려있는 건 아니에요. 계시록의 시작 부분에 각 교회에 요한이 권면하고 질책하는 말을 담고 있잖아요? 모든 성도가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 어떠한 신앙적인 분투를 하고 있는데, 요한은 그 싸움을 끝까지 해내길 응원하는 거예요. 암호 편지로 말이죠.

여러분에겐 오늘 읽은 계시록의 말씀이 어떻게 들려오나요? 예수님이 완성하실 구원, 그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위로가 되고, 어떤 신비한 설렘으로 와 닿으신가요? 아니면 나랑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시나요? 침묵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기억나지 않는 분은 조용히 다시 읽어보셔도 좋겠어요. 기도하겠습니다.

 

김동환 목사는, 길섶교회를 섬기며, 평일에는 초등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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