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스스로 비우시는 하느님
[곽건용] 스스로 비우시는 하느님
  • 곽건용
  • 승인 2019.02.21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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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7(빌립보서 2:5-8)

좋은 신앙 같지만 그렇지 않은 잘못된 신앙

오늘은 작년 11월 마지막 주일부터 시작한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시리즈 설교 일곱 번째이고 ‘간섭하는 하느님에서 지켜보는 하느님으로’라는 소주제 세 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주일에 한 주 건너뛰었으므로 두 주일에 걸쳐 한 이 소주제 설교를 짧게 요약한 다음에 오늘 얘기를 하겠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 모든 일들은 하느님의 의도와 계획과 목적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런 일이 벌어진 데는 하느님의 특별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 당장 ‘하느님은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고 계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냐.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나...’라며 그와 같은 문제 제기를 ‘불신앙’으로 간주하고 꾸짖기까지 합니다. 그런 일을 하느님이 하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대체 뭐 하시는 분이냐고 까지 말합니다. 마치 하느님은 반드시 그런 일을 하셔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착한 사람은 복 주고 악한 사람은 벌주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대체 뭘 하시는 분이냐는 겁니다. 하느님마저 인과응보, 사필귀정의 원칙을 외면한다면 그런 하느님이 왜 필요하냐고 언성을 높이는 사람도 봤습니다. 물론 사람 사는 세상에 인과응보와 사필귀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니까 그게 지켜졌으면 하는 소망을 하느님에게 투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들 대부분은 이래서 무신론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에게 정의를 구현해야 할 임무나 사명 같은 것을 부여해놓고 그게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면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런 까닭에 무신론자가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신앙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두 가지를 얘기했는데 첫 번째는 이런 신앙은 사람을 자유의지를 갖고 자유로운 결단을 내리는 주체적인 존재가 아닌 꼭두각시나 로봇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됐다는, 그래서 자유의지를 갖고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서의 인간관에 배치됩니다.

이런 신앙의 두 번째 문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모든 노력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운명론에 빠뜨린다는 겁니다. 세상만사가 하느님이 미리 정한 대로 일어나는 것이라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애쓰는 인간의 노력은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어차피 하느님이 정해놓으셨고 그렇게 이끌고 가신다면 그 방향으로 사람이 일을 할 필요도 없고 또 반대 방향으로 일하는 게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사람이 뭐라고 이래라저래라 하겠나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은 바꾸어야 할 불의한 현실을 정당화하고 은폐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 되는 것이고요.

하지만 예수님의 하느님 신앙은 이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리 된 게 아니라고 하셨고, 실로암 망대가 넘어졌을 때 거기 깔려죽은 사람들이 다른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으며,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 사람은 자기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에 그리 된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겪는 불행은 그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를 뒤집으면 사람이 겪는 행복도 반드시 그의 미덕 때문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꼬치꼬치 참견하시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일까요? 그저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시는 분일까요? 이신론자(deists)들의 주장처럼 하느님은 세상을 만들고 거기에 법칙을 부여해놓으시고는 그 다음에는 피조물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아무 상관도 않고 돌보지도 않으며 그저 무심하게 계시는 분일까요?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의미

성서는 매우 일찍부터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고 그걸 어떻게든 표현하려고 애쓴 흔적을 여기저기에 남겨놓았습니다. 그 중에 저는 지난번에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은 얘기를 했습니다. 이 얘기도 바로 이 점을 표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에게 아들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땅을 달라고도 하지 않았고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에게 아들과 땅을 주신다고 약속한 겁니다. 아브라함이 원치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 부부는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늙어버렸고 땅도 갖게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성취 여부에 의심이 생기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이때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이 성취될 것임을 확인해주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표징을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짐승들을 둘로 갈라놓고 횃불이 그 가운데를 지나가게 하고는 그것이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언약의 당사자들 중 어느 편이든 언약을 깨뜨린다면 그 짐승 신세가 될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뿐 아니라 하느님이라 할지라도 언약을 깨뜨린다면 갈라진 짐승 꼴이 될 거라는 얘기입니다.

William Blake (1757~1827)
William Blake (1757~1827)

하느님이 왜 이래야 합니까? 이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절대자요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입니다. 하느님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개념은 ‘필연’이나 ‘의무’ 같은 겁니다. 하느님에게는 그래야 할 필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사필귀정과 인과응보를 요구하고 그걸 하지 않으면 마치 하느님이 직무유기라도 하는 듯 말들 하지만 사실 하느님은 거기에 얽매인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그런 것들을 어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저 멀리 초월해 계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욥기 마지막 대목인 38장 이후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신 내용도 바로 이것입니다. 욥처럼 죄 없는 의로운 사람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현실은 사람 사는 사회에 분명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임에 분명합니다. 하느님도 이를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계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욥이 지은 죄가 있어서 고난을 당한다고 위로가 아닌 비난을 하는 세 친구들을 꾸짖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하느님은 욥을 가리켜서도 ‘어리석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말의 뜻은 그가 지혜롭긴 하지만 자기 지혜의 한계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제한된 지혜로는 창조의 섭리와 하느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깨닫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언약 맺는 얘기에서 하느님은 욥기의 하느님보다 적어도 몇 발짝은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와 계십니다. 언약의 하느님은 욥을 비판하신 것처럼 당신이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했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는지 너는 아느냐, 세상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나 할 수 있느냐,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어디 네 말 한 번 들어 보자라고 사람을 다그치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제한된 지혜로는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어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당연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런 사람과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하고 자신을 구속하신 겁니다. 어렸을 때 운동회에서 자주 했던 게임들 중에 ‘이인삼각’이란 게임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쪽 다리를 서로 묶고 박자를 맞춰서 결승선까지 달려가는 게임입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언약은 마치 이인삼각과 같은 겁니다. 하느님 입장에서는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에게 뭔가를 약속하고 그걸 지킬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하셨습니다. 성서는 이런 방식으로 하느님이 사람과 관계를 맺으셨다고 말합니다.

 

창조와 하느님의 자기 비움

<우리 안의 가짜 하나님 죽이기>의 저자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는 하느님의 창조신학을 이런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농담반 진담반의 유대인의 조크에 이런 게 있습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랍비에게 “하느님은 세상을 만들기 전에 뭘 하고 계셨어요?”라고 묻자 랍비는 “너처럼 쓸데없는 걸 묻는 녀석 맴매하려고 회초리를 만들고 계셨지.”라고 대답했다는 조크입니다. 제가 농담반 진담반이라고 말한 이유는 물론 농담이지만 이 안에는 작은 진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궁금해온 점은 창조 전에 하느님이 뭘 하고 계셨는지 보다는 하느님은 ‘왜’ 세상을 만드셨는가 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왜 세상을 만드셨을까요? 뭐 하러 세상을 만드셨는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느님은 왜 세상을 만드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대교와 기독교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신학자들이 내놓은 대답들 중에 가장 그럴 듯한 것은, 고상하게 말하면 하느님은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답이고 조금 덜 고상하게 말하면 ‘심심해서’라는 대답입니다. 하느님이 유아독존, 곁에 아무도 없고 홀로 존재하시니까 너무 심심해서 관계를 맺을 동반자로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겁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한 ‘나와 너’(I and Thou) 중에 ‘너’로서, 대화와 소통의 동반자요 상대방으로서 사람과 세상을 만드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사람들의 생각이 갈라집니다. 한쪽에서는 이런 하느님은 피조물에 대해서 절대적인 주권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하느님 맘대로 해도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을 거기에 대해 찍소리도 못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세상을 일개 ‘대상’이나 ‘객체’(object)로 창조하신 게 아니라, 다시 말해서 ‘나와 그것’(I and It)으로 창조하신 게 아니라 ‘나와 너’ 곧 당신과 같은 눈높이, 같은 자리에서 관계를 맺는 주체요 동반자로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창조는 하느님의 영역을 일정 부분 내어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부리고 조종하고 지배할 대상으로 세상을 만드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일정부분 비워서라도 관계를 맺을 동반자가 필요해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겁니다.

언약신학에서 하느님이 이인삼각처럼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스스로를 묶었다고 표현한 바로 그것을 창조신학에서는 하느님의 ‘자기 비움’ 곧 그리스어로 ‘케노시스’(kenosis)라고 표현합니다. 창조는 곧 피조물에게 자리를 내어주시기 위해 자신을 비우신 하느님의 자기 비움이라는 겁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비워서 그 빈자리를 피조물로 채우셨습니다. 왜? 그래야 피조물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느님의 자기 비움의 결정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오늘의 본문인 빌립보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우시는 케노시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이지만 정의에 갇혀 있는 분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에게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정의와 사랑을 원하고 기도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그것을 베풀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간구하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그럴수록 더 간절히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느님이 기적이나 마술을 통해서라도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삶의 염려와 불안과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지 않습니다. 우리네 사람의 현실에 대한, 인생의 의미와 인간실존에 대한 완벽하고 결정적인 대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과 맞부딪치면서 살아야 하고 인생의 의미를 묻고 또 물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간 실존의 불안정성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불안정성과 동시에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문제들을 하느님이 다 해결해주시리라고 기대하는 게 아닙니다. 또한 하느님 대신 부와 권력 같은 것들이 우리를 불안, 염려,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리라고 믿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을 성서는 ‘우상숭배’라고 부릅니다. 그 대신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 속에서 생의 의미를 묻고 또 물으면서 실존의 불안정성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진정한 하느님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했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를 신뢰해서 당신 자리를 비워주신(케노시스) 하느님과 더불어서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에 대해 짧게 얘기하고 이 소주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느꼈겠지만 꼬치꼬치 간섭하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하는 기도와 하느님이 자신을 비워서 사람을 성숙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람의 기도는 다릅니다. 또 마땅히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사람을 위해 당신의 영역을 양보하고 비우신 분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세상일을 도맡아서 모조리 혼자 처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매사에 우리들과 끊임없이 소통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삶의 의미와 방향을 스스로 찾아가게끔 인도하시는 이정표 같은 분입니다. 곧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얘기입니다. 설령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럴 때조차 하느님은 우리를 믿고 기다려주십니다.

‘정의’를 위한 기도를 예로 들어 얘기해보겠습니다. 정의는 인간사회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의를 이뤄야 합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함을 물론이고요. 그런데 우리는 모든 인간사에 꼬치꼬치 간섭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를 비워 내어주시며 우리에게 자유와 책임을 부여하신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하느님에게 정의를 이루어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정의를 이룰 수 있게 우리를 믿어주시고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게 옳습니다. 이는 말장난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에게 홀로 정의를 이루어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정의를 이루겠다는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어주심으로써 그것의 가치를 스스로 깨닫게 되고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의 글 한 도막을 인용하겠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바꾸려는 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하느님)은 언제나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가 현실을 바꾸어달라는 요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은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관리, 운영과 유지는 우리 손에 달려있으므로 모든 기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신(하느님)과의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만남은 바로 우리를 바꿔 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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