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정통 교회에 회개의 영이 임하기를
보수정통 교회에 회개의 영이 임하기를
  • 정한욱
  • 승인 2019.01.05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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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뉴스앤조이, 2018년
백소영,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뉴스앤조이, 2018년
백소영,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뉴스앤조이, 2018년

‘30년 된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소개하는 백소영 교수는 ‘세상’뿐 아니라 ‘교회’에서까지 페미니즘이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상전벽해의 현실을 보면서, 페미니즘을 알기 위해 길을 떠난 ‘믿는 페미’들이 원하는 보물을 찾을 수 있도록 ‘맥락들’을 안내하는 ‘보물섬 지도’를 그려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역사상 존재했던 다양한 페미니즘의 흐름과 기독교 페미니즘의 대표적 패러다임들을 소개한 후, “의심의 해석학”을 포함한 여러 해석의 도구를 통해 여성의 눈으로 ‘재구성된’ 신학과 성경 읽기의 다양한 예를 제시한다. 저자는 하나님 안에서 보편에 참여하려면 생물학적 남자도 페미니스트여야 하며, 여성들은 ‘초월성’과 ‘보편성’이라는 기준 아래 권위를 가지고 두려움 없이 새로운 전통들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놀랍고도 탁월한 ‘보물섬 지도’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 후 간단한 단상을 덧붙이기로 한다.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페미니즘이란 5천년 가부장제의 역사 가운데 가장 지속적이고 대규모로 시스템 안에 있었으나 현재의 시스템을 만드는 데 참여하거나 자신들의 위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여성들이, ‘대표성’을 가진 ‘주체’가 되어 가부장제 아래서 잊혀지고 숨겨지고 버려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복원하거나,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여성 경험으로 나와 공동체와 세상을 해석하거나, 이런 해석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그릇’(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행하는 모든 생각과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단 가부장적 시스템을 옹호하며 개인으로서 “명예 남성”의 삶을 선택한 여성들의 의미 추구는 ‘체제 안’의 사유와 행동이기에 페미니즘이 아니며, 주체로서의 자기주장이 현재의 시스템을 만드는 데 반영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그의 자기 해석은 페미니스트적 성찰에 포함될 수 있다.

근대의 부드러운 가부장제  전근대 시절 이전의 모든 텍스트는 여성의 목소리를 제거해 왔으며 ‘대놓고 여성 혐오적’이었다. 그러나 근대 페미니즘의 선구라 할 수 있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옹호』에서 여성도 교육기회가 허용된다면 남성들과 동일해 질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해 근대의 중산층 시민 남성들은 여성을 사랑의 대상이요 보호의 대상으로 명명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생존을 위해 임금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있게 있게 된 여성들을 위한 가장 적합한 장소가 가정이라고 강변하는 ‘부드러운 가부장제’로 응수했다. 여성의 입장에서 페미니즘이란 남성 없이도 온전하고 완전할 수 있으며 내가 내 삶의 주체로서 나를 해석할 수 있는 권리와 권위를 가진다는 주체 선언이지만, 남성들은 이를 낭만적으로 여성을 보호하면서 자기 확장을 시도하는 근대적 ‘남성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후기-근대 사회와 가부장제  그러나 한 가족의 경제적 책임과 권한이 배타적으로 성인 남자에게 주어지는 제도인 가부장제는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 안에서 이미 폐기되었을 뿐 아니라, 외벌이로는 핵가족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탈성적 전문가 개인”을 요구하게 된 후기-근대 사회에서도 더 이상 유지가 불가능한 제도가 되었다. 이제 근대 이전의 노골적인 여성 혐오적 가부장제이든 근대 이후의 부드러운 가부장제의 형태이든 가부장제를 ‘신적 질서’로 고집하는 것은 ‘문화적 관성’일 뿐이다. 생물학적인 남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그분 안에서 보편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페미니스트여야 하며, 무엇이든 자꾸 설명하려 드는 남성들은(맨스플레인) 입을 다물고 먼저 여성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처음 서구권에서 등장한 페미니스트 사상은 서구 시민혁명의 연장선상에서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면 여자들도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나 시몬 드 보부아르 그리고 베티 프리단에 의해 대표되는 이 사상은 가부장제 아래서 자신을 표현할 기회와 자유를 박탈당한 현실에 대한 분노했던 백인 엘리트 중산층 여성들의 경험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철저히 주체/개인이 되는 것이었고, 목표는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으며, 경제권을 확보할 수 있는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법적 제도적 자유를 쟁취한 후로는 여자 개인에서 “명예 남성”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우머니스트  흑인 페미니스트들인 우머니스트(womanist)들은 자신들의 ‘여성’경험이 중산층 백인 엘리트 여성들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했으며, 혼자서도 삶을 버텨낼 수 있는 책임감 있는 강한 여성성과 나보다 어린 생명을 돌보고 길러 내는 따뜻함과 생기를 잃지 않는 모습인 ‘우머니쉬’한 경험과 능력을 ‘흑인 페미니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또한 그들은 배제보다는 아우르는 힘을 지향하며, 상호 동반자 관계야말로 사랑의 토대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자칫하면 개인의 실천 면에서 가부장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힘을 싣게 될 수도 있다.

급진적 페미니즘 I 196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해 1970~1980년대에 본격화되기 시작된 페미니즘 2기 운동은, 여성 해방이나 인권 문제가 단순히 법적 권리 획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회 구조와 관계된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대부분 마르크스의 계급 분석 틀을 기저에 깔고 있다. 1기 페미니즘의 핵심어가 ‘권리’라면 2기 페미니즘의 핵심어는 ‘정체성’이다. 우리가 여자라는 것을 당연으로 두고 여자로서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는가에 몰두한 것이 1기 페미니즘이라면, 2기에 접어들어서는 “과연 여자란 무엇인가”, “우리는 여자여야 하나”, “여자라면 어떤 방식으로 여자여야 하나”라는 질문을 가지고 다양한 답을 제시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된다.

급진적 페미니즘 II 이러한 급진적 페미니즘에는 (1)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한 일부일처제적 성관계를 지속시키는 핵가족을 해체하고 재생산은 인공 생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과 같이 성차의 소멸을 통해 여성 해방을 이루고자 했던 입장 (2) 뤼스 이리가레나 엘렌 식수처럼 “남근로고스중심주의”로 대표되는 세계 안의 남성 상징을 거세하고, 여성적 글쓰기와 여성 상징의 도입을 통해 ‘진정한 성차’를 발현시켜 여성해방과 새로운 문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 (3) ‘여성성’이나 ‘성차’를 본질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성 정체성을 수행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 문화적 구성물(수행적 정체성)로 간주한 주디스 버틀러와 같이 젠더와 섹스의 구분을 해체하는 입장 (4) 자연 · 인간 · 기계 사이의 경계를 없애 위계를 만들 수 있는 정체성 자체를 ‘잡종’(혼종성, hybridity)으로 만듦으로서 젠더 없는 세상으로 나가자는 트랜스 페미니즘의 입장이 있다.

기독교 페미니즘 가부장적 기독교 남성들에게 ‘마녀’로 응시되는 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은 네 범주로 나뉜다. (1) 메리 데일리나 캐롤 크라이스트 같이 제도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넘어섰지만 기독교라는 테두리의 바깥에 접해서 새로운 종교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탈성경/탈기독교 페미니즘 (2) 로즈마리 류터나 필리스 트리블처럼 성경을 ‘주어진’ 기독교 유산으로 인정하되 감추어졌거나 충분히 강조되지 못한 페미니스트적 본문이나 전통들을 살려 여성해방을 진행하자는 전통 안에서의 페미니즘 (3)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와 카터 헤이워드로 대표되며 가부장적임이 명백한 성경 본문과 기독교 전통에 대해서는 의심하고 비판하며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통의 페미니스트적 재구성 (4) 도로테 죌레나 비벌리 해리슨 같이 자본주의제’를 ‘가부장제’만큼이나 중요한 해체 대상으로 간주하고 성경과 기독교 전통의 ‘해방적’ 유산들을 재해석하며 보다 큰 구조적 싸움을 위한 연대를 강조하는 사회주의 기독교 페미니즘.

전통의 재구성 I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은 지금까지 남성과 사제들의 하나님 이해, 공동체 윤리를 내려 받으며 형성되어 왔으며, 우리는 오늘 이 전통을 중요하게 살피되 “의심의 해석학”을 통해 페미니스트적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1) 이를 위해 성경 본문 중 어떤 것이 더 권위 있는 본문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계시인지 판단해야 하며, 그 기준은 ① 그 당시 인간들의 문화적 편견으로는 나오기 힘든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살피는 초월성과 ②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피는 보편성이다. (2) 또한 주어진 성경 안에서 참된 ‘하나님의 계시’를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무엇이 가려지고 삭제되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며, 초기 기독교 운동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약했지만 남자들에 의해 탈락되고 오해되고 잊힌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단편적인 기록이나 자료에서 여성 제자들의 이름을 복원하고 이를 역사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전통의 재구성 II  전통을 재구성하려는 페미니스트들의 핵심 주장은 ‘우리도 전통을 만들어 갈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초월성과 보편성의 기준을 가지고 주저하지 말고 두려움 없이 권위를 가지고 새로운 전통들을 계속 만들어가야 하며,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만든 이론이나 실천이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초월이요 보편이신 하나님을 더 잘 드러낸다면 새로운 전통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① 하나님만을 ‘아버지’로 인정함으로서 인간 ‘아버지들’에게 부여된 가부장적 권력을 거부하는 것 ② 남성 중심의 문화에서 여성의 죄는 교만이 아니라 의존, 자기 정체성의 결여, 자기를 버릴 정도로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행위임을 인정하는 것 ③ 분노하는 것은 죄라는 가르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사랑의 행위 가운데 행해지는 분노의 힘”을 새로운 기독교 윤리 덕목으로 제안하는 것 ④ 비성경권에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는 스펙트럼이 다양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등을 ‘새로이 재구성된’ 전통의 예로 들 수 있다.

페미니즘으로 성경 읽기  페미니즘으로 성경을 읽는 방법론에는 ① 미리암이나 드보라 야엘 같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형태이든 와스디나 이세벨 아달리야와 같이 감추어진 형태이든 성경 속에서 여성 리더십 찾아내기 ② 그 본문이 쓰인 당시 문화권에서 무슨 의미였는지를 해석하고, 21세기에 적용할지, 수정할지, 버릴지를 결정하는 문화적 콘텍스트 속에서 성경 읽기 ③ 라합처럼 식민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해방과 자유를 얻기 위해 주인의 힘을 역이용하여 해방과 자유를 쟁취하겠다는 전략인 포스트콜로니얼 성경 읽기 ④ 나를 해방시키지 않는 본문에 매여 있지 않고 현 권력의 복잡하고 중첩된 관계망 안에서 ‘살고’ ‘살리는’ 데 힘이 되는 본문 찾기와 해석 작업을 진행하는 우머니스트적 성경 읽기 등이 있다. 여성의 힘과 권위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데 힘이 되는 본문과 해석, 성경의 경줄을 잡고 오늘의 상황에서 위줄을 잡아내는 재구성과 재생산의 실험이 필요하다.

한국 페미니스트 언니들의 통사  우리나라 페미니스트 계보학의 시작이랄 수 있는 ‘전도부인’과 근대적 주체를 가장 극단적으로 주장하고 살아 냈던 나혜석, 주체성을 가지고 공동체적 헌신과 참여를 강조했던 최용신 등은 자유와 권리를 찾는 1기 페미니즘 운동의 계보에 함께 묶을 수 있다. 그 후 등장한 2기 페미니스트들은 산업화 현장에서 ‘해방의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여기에 페미니스트적 시각을 더했으며, 철저히 빈민 여성 중심 중심이었지만 생물학적 여성만을 고집하는 배타성 없이 넒은 외연을 가졌다. 그리고 2016년 5월의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엘리트 중심의(top-down) 페미니스트 조직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조직하는 일반인들의 급진적이고 수평적인 페미니스트 모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믿는 페미’ ‘갓페미’도 이때를 계기로 본격화된다.

21세기 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나 기능적으로는 위계적”이라는 개신교 가정 담론은 전근대적 여성 응시를 그치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자유롭게 하지는 못했다. 신앙심 깊은 오늘날의 자매들은 밖에서는 “탈성적 전문가 개인”으로 경쟁력을 가진 주체로 살다가, 교회나 선교 단체에 오면 개신교가 ‘정통’이라고 담론화한 여성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한 여성이 주체적 결단으로 공적인 삶을 포기하고 가정을 선택하는 것은 존중받아야 하나, 그것을 성경이 가르치는 ‘신적 질서’로 고착화해서는 안된다. ‘성경적 페미니즘’이 가능한 이유는 성경이 한결같이 수직 위계를 90도 꺾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손길을 고백하기 때문이며, ‘관계성’ ‘상호애’ ‘공존’이 우리 시대의 ‘성경적 페미니즘’이 부여잡고 씨름해야 하는 키워드이다.

저자의 입장은 기존의 성경이나 신학 전통을 떠나거나 거부하지는 않지만, 여성을 억압하는 성경의 가부장적 전통은 “의심의 해석학”이 제시하는 ‘초월성’과 ‘보편성’의 기준으로 철저히 비판하며 여성주의적 입장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생각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왜 수천년 전 중근동 지역의 ‘여성 혐오적 가부장제’라는 문화적 제약 아래 살던 여러 남자들의 ‘모자란’ 소리까지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숭배해야 하는가? 서구의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지극히 근대적인 가족제도인 ‘부드러운 가부장제’를 대체 왜 후기-근대 사회를 살아가는 내가 영구불변한 성경적 제도라고 믿어야 하는가? 엘륄의 말마따나 기독교의 진정한 비극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일제통치나 나치치하, 가혹하거나 부드러운 가부장제를 막론하고 기꺼이 당대의 정치, 경제체제의 수호자이기를 자처해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한 여성의 남편이자 두 딸의 아버지인 나는 그들이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받은 잠재력을 맘껏 실현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신적 질서’의 이름으로 여성들이 목회와 같은 특정 직역에서 배제되거나, 자신의 의사에 반해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삶의 영역이 제약되는 세상을 참을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생물학적 여성도 아니거니와 가부장 체제의 커다란 수혜자인 내가 ‘페미니즘’ 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들을 자꾸 들추는 중요한 이유다. 다행히 세상은 미약하나마 내 딸들이 조금 더 주체적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디 하나님과 성경을 참칭하며 비성경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가부장 질서를 놓지 않으려고 마지막까지 발버둥치고 있는 “보수정통” 교회에도 언젠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회개의 영’이 임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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