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예수님을 찾아서
[이택환] 예수님을 찾아서
  • 이택환
  • 승인 2019.01.01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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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눅 2:41-52
Jesus Ma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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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TV에서 보게 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나 홀로 집에>, 아니면 <나 홀로 집에 2>지요. 어느 방송에선가 꼭 틀어줍니다. 올해도 지난 성탄절 저녁에 모 TV에서 <나 홀로 집에 2>가 방영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휴가 때, 대가족이 여행을 떠나면서 막내아들을 두고 갔다 일어난 사건을 다룬 유명한 홈 코믹물이지요. 가족이 많다보면 정황이 없을 때, 얼마든지 아이를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부모도 유월절 순례기간 중, 열두 세 살 된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으니까요. <나 홀로 집에>가 어쩌면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모티브를 얻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매년 유월절이 되면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약 120킬로미터나 되는 순례여행을 떠났습니다. 걸어서 3-4일 이상 걸리는 꽤 먼 거리였지요. 유월절 행사는 예루살렘에서만 8일 동안 진행되었고, 나사렛에서 오가는 여정을 합치면 보름 남짓이 걸립니다. 원래 모세 율법에 의하면 남자들은 1년에 세 번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먼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들은 몇 년에 한 번, 혹은 평생에 한번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모가 매년 유월절에 나사렛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다는 것은 그들이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유월절 순례를 꼭 성인 남자들만 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전 내부에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구역이 있어서 그렇지, 순례여행에는 여성과 아이들도 참여했습니다. 아마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도, 매년 그랬듯이 어린 예수님이 잘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그렇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여행은 가족단위의 오붓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44절의 동행은 같은 마을의 친족이나 이웃들이 캐러밴과 같은 집단을 이루어 떠나는 공동여행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당시 풍습에 따르면, 이런 공동여행단은 선발대와 후발대로 성인 남성들이, 그리고 중간에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동 중 위험한 곳을 지날 때도 있고, 강도들을 만날 수도 있기에 이런 이동형태를 유지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떤 이스라엘 전문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소년이 열두 살에서 열세 살이 될 때, 성인식을 치르고 어른이 되는데, 예수님이 바로 예루살렘 방문기간 중 그 시기를 맞이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하루사이에 당장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은 소년처럼 여겨졌다고도 합니다.

Jesus Ma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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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위치가 애매해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는 행렬 중간 어린이 자리에 있었는데, 나사렛으로 돌아갈 때는 예수님이 선발대나 후발대에 위치해야 하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사람들이 심지어 예수님의 부모조차, 헷갈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발대에 없으면 후발대에 있으려니, 후발대에 없으면 선발대에 있으려니, 양 쪽 다 없으면 중간에 있으려니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다 결국 하루가 지난 후에야, 예수님이 그 행렬에 처음부터 합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이지, 꼭 그랬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요셉과 마리아는 난리가 났습니다. 48절에 근심하며(오뒤노메노이, 슬퍼하며, 비통해하며) 아이를 찾아다녔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우리 가정도 20여 년 전에 아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 직장에서 근무 중, 아내에게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아들이 외할머니 집에서 외숙모(제겐 처남댁)와 같이 시장에 나갔다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일하다 말고 급히 택시를 타고 가서 인근 파출소에 가보았더니, 다행이 지나가는 행인이 길 잃은 아이를 파출소에 데려다 줘서 찾을 수 있었지요. 그 때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심정이 정말로 48절의 오뒤노메노이, 슬퍼하며 비통해하며, 바로 그대로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다시 하룻길이나 되는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결국 예루살렘을 떠난 지 삼일 째 되는 날에서야 예수님을 찾습니다. 파출소가 아닌 성전 안에서였지요. 거기서 그들이 두 번 놀라게 됩니다. 첫째는 슬퍼하고 비통해하는 자신들과는 달리, 어린 예수는 성전 안에서 편안하게 서기관과 율법사들과 함께 앉아, 그 선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루살렘의 쟁쟁한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이 어린 예수님의 지혜, 그 이해력과 답변하는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린 예수를 사로잡는 관심거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달란트가 어디에 있는지 그 때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진리를 배우고, 익히고, 가르치는 것이었고, 달란트는 이 모든 일에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도 자신의 주요 관심사와 달란트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단지 좋은 점수를 받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나쁜 점수를 받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만 강요하고 있지요. 그런 방식으로는 설령 좋은 점수를 받아도 자신의 관심사와 달란트를 잘 모르기 때문에, 단지 세상의 평판을 따라 문과는 법대, 이과는 의대를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 법관이 되고 의사가 되어도 대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해 선택의 폭이 줄어들 경우는 더 심각할 수 있겠지요. 이게 다 자신의 관심사와 달란트를 본인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고, 친구도 모르고, 주위 사람들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아니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걸 몰라야 하지요. 그렇게 자신의 관심사와 달란트에 대해 생각할 시간에, 문제 하나를 더 풀어서 점수를 높이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그러니 예수님처럼 유월절 순례를 마치고 부모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함께 가지 않고 성전에 남아, 결과적으로 자신의 관심사와 달란트를 확인하게 될 일탈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어린 예수님이 일부러 부모님을 소위 골탕먹이려고 성전에 남은 것은 아닐 겁니다. 성전에서 배우는 율법에 대한 토론이 너무나 좋아서였겠지요. 아이들이 밥 먹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잠도 자지 않고 밤을 새워 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일탈행위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 무엇인가? 부모는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그것은 어린이, 청소년뿐만 아니라 청년들도 스스로 자신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주제이기도 합니다(만약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아야 한다면, 그런데 딱 한 가지 밖에 가져갈 수 없다면, 저는 바이올린 하나를 가져가겠습니다. 그것을 어릴 때 알았어야 하는데, 50이 되어서야 알았지요).

그렇게 예수님을 힘들게 찾은 마리아가 화가 나서 예수님을 질책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사실 이런 일은 단지 질책으로 끝날 게 아니라,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13:24). 부모를 근심시키고, 여러 친족들과 이웃 앞에서 수치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979년 스웨덴이 세계 최초로 자녀 체벌을 금지하기까지, 체벌은 전 세계 모든 부모의 권한이었습니다. 현재 50여개 국가가 자녀 체벌을 금하는데, 프랑스조차 2016년에 가서야 겨우 여기에 참여했고(그나마 처벌규정도 없음), 우리나라는 아직도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체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어린 예수님이 순순히 잘못했다고 답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반문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마리아는 너의 아버지 요셉이 근심하여 너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있는데,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고 부모님들이 그것을 진작 아셨어야 하는데,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 집이란 꼭 하나님의 집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일, 또는 아버지 하나님께 속한 그 무엇을 말합니다. 요셉으로서는 야속한 답변일 수 있지요.

지금 예수님은 언젠가 자신이 집을 떠나 부모, 형제, 친척, 이웃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어떤 일, 때로는 그들이 생각할 때 가슴 아프고, 불명예스러운 일을 (하나님을 위해) 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 일을 위해 언젠가 예수님을 순순히 놓아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때가 되면 붙잡을래야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부모가 이를 순순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당장 요셉과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그럼에도 마리아는 다른 부모들과는 달랐습니다. 51절 하반절,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마리아는 당장 이해가 가지 않아도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행동이지요. 예수님은 그날로 당장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고 가출한 게 아닙니다. 열 두세 살부터 30대 초반까지 거의 20년간 예수님은 부모님께 순종하며, 가정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51절 앞부분,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이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게다가 아버지 요셉을 일찍 사별한 예수님은 장남으로서 아버지 요셉처럼 목수 일을 하며 가장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듯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서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특별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이를 때까지, 예수님은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일상의 삶을 사셨던 것이지요.

그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특별히 하나님과 이웃을 생각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5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아멘).”

2018년 한 해를 정리하면서, 1. 우리도 습관을 따라 부지불식간에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을 잃어버렸음을 깨닫는 순간, 예수님을 찾아 나서기 바랍니다. 3. 자녀들의 관심사와 달란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4.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도 스스로 자신의 관심사와 달란트를 생각해 봅시다. 5. 우리 모두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관심사와 달란트를 따라 익숙한 것과 결별할 수 있음에 대해 해야 함을 생각합시다. 6. 그렇다고 해서 때가 되기도 전에 자신의 일상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7. 우리 모두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찾는 것은 곧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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