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누구냐?
너, 누구냐?
  • 김기현
  • 승인 2017.11.21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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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의 성경읽기 - 에스더 2:1-18
렘브란트(Rembrandt), ‘Ahasuerus and Haman at the Feast of Esther’(1660)
렘브란트(Rembrandt), ‘Ahasuerus and Haman at the Feast of Esther’(1660)

오래도록 영화와 담 쌓고 살다가, 대학과 신학대학원 다닐 때에 나름 영화광이요 마니아라고 자부했지만, 석박사 공부하려, 생활에 쪼들리랴, 사역하랴, 영화 볼 틈도, 돈도 없어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아내랑 모처럼 본 영화가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 열렬 팬들의 찬사를 듣고 보았는데, 잔인한 폭력성만 기억 남는다. 한국 영화가 너무 폭력적이 된 게 아녀? 뭐 그랬다. 그래도 인상적인 한 대목은 주인공이 그 이상야릇한 감옥 같은 여관에서 나와서 뭔가를 먹으면서, 그리고 거울을 보면서 묻는다. ‘, 누구냐?’ 소름 돋던 그 질문은 내가 나에게 묻는다. ‘, 누구냐?’

 

1. 여는 말 : 에스더는 누구인가?

2장에 나타난 에스더를 이해할 때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그녀를 오로지 여성으로, 그리고 성적인 매력을 풀풀 풍기는 여성으로 그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여성으로 그리는 것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만약 그렇게 성서를 읽는다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에스더서는? 다른 하나는 왕의 행동이다. 그저 예쁘고 섹시한 여자 하나 구하려고 이런 일을 벌일까? 그렇다면 궁 안의 모든 여성을 상대로 성적 유희를 즐길 수 있지 않는가? 다시 말해, 지금 왕은 왕비를 구하는 중이다. 어쩌면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일 수도 있는.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여성을 찾고 있다.

이 두 가지 지점을 놓치면 아리따운 여성이 왕비가 되어 출세했다는 이야기로 그친다.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그녀는 포로민이다. 그녀에게 페르시아는 유배지다. 앞서 말한 대로 유배지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그러니까 그곳에 동화되면서도 동화되지 않는, 전대미문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2장만이 아니라 에스더서 전체를 읽는 keyword이다.

 

2. 본문 설명(1-4)

크세르크세스 왕에게서 시작하자. 그는 후회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와스디를. 왜 후회하고 그리워하나? 일단 시간으로는 4년이 흘렀다. 13절은 와스디 폐위 사건이 왕의 재위 3년째 있었다고 기록한다. 216절은 재위 7년이라고 되어 있다. 왕비를 뽑는 절차가 1년가량 걸린 것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3년이 지났거나 4년 후 일이다.

성경만 놓고 묵상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밖 역사 이야기는 한편 재미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경을 어렵게 만드는 한 요소다. 저런 걸 알아야 성경도 알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면 성경이 괜스레 멀어진다. 목회자나 좀 더 알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정보를 제공한다면, 크세르크세스의 재위 3년과 7년 사이에, 그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이 있었고, 그리스에게 처절한 패배를 경험한다. 지금 왕은 패장이다. 그런 그의 입지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국내 정치적 지위가 흔들렸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그럴수록 더 강력한 철권통치로 국내의 반발을 억누르려고 했을 수도 있고, 대화와 소통의 정치를 선택할 수 있다. 역사가에 의하면, 왕은 패배한 뒤 환락에 빠져 지내다 죽었다고 한다.

이 정도의 정보만 놓고 본다면, 왕이 와스디를 그리워할 법 하다. 1절에서 기억했다, 생각했다고 되어 있지만, 은 와스디를 그리워하고, 자신의 어리석고 즉자적인 행동을 후회한다는 것이다. 자기 앞에서 당당하게 꿇리지 않던 그녀가 지금 왕에게 필요한 것이다. 자신과 맞설 줄 아는 당당함을 지녔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희생해 줄 아는 그런 왕비 말이다. 하여간에,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은 자기가 하는 짓은 모르고 여성에게 이상적인 아우라를 뒤집어씌우는 비현실적인 몽상을 잘 한다. 하여간에 남자들이란...

내가 아무 근거 없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1절을 보면, ‘그녀가 행한 일을 생각했다. 예전의 그였다면, 곱씹을수록 울화통이 터질 법한데, 지금 그녀의 행동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녀와 같이 행동하는 여성, 동반자, 동지가 필요하다, 아쉽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또 하나의 근거는 조서를 내린 일에 대한 부분이다. 에스더서의 저자는 이 문장을 수동태로 기록했다. 그러니까 왕이 능동적으로 결정한 조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왕이 그렇게 느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옹졸한 왕은 이런 생각을 내심 품고 있다. “나는 그렇게 까지는 안 하려고 그랬는데, 저 놈들이 너무 설레발치며 침소봉대해서 문제를 키운 거야. 저 못된 놈들!” 2절을 보면, 신하들이 왕의 마음을 눈치 채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안 그래도 전쟁에서 진 왕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큰 화를 입게 될지 모른다. 그들이 보기에 왕은 여자가 그리운 것이다. 이쁜 여자 하나 품에 안기면 왕의 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질 것이다. 신하들은 몇 번이나 아리따운, 아름다운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왕은 그 말에 자기 맘에 쏙 들었다.

저 노회한 신하들을 저리 천박하게 읽기 싫다면, 그래서 왕과 왕국의 안위를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안녕을 도모하는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신하로 읽기 원한다면, - 나는 그렇게 읽을 수 있고, 그게 더 타당하다고 본다. - 왕의 심리적 안정과 왕실의 평안, 더 나아가 정국과 왕국의 안정을 위한 조치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왕과 신하들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어찌되었건 자신들에게 떨어질지도 모르는, 와스디 사건으로 자신들에게 패전의 책임마저 물으려는 왕의 의도를 파악하고 적절하게 잘 대응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읽으면, 여는 말에서 밝혔듯이, 에스더는 그저 성적 매력만 가진 여성이 아니라 외모와 함께 지혜도 갖춘 여성이 된다.

 

3. 본문설명(5-7, 10)

저자는 왜 이 부분에서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정체성을 밝힐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말라는 말을 굳이 밝힐까? 이것이 나의 의문이고, 2장은 물론이고 에스더서 전체를 해명하는 요점이다. 중요한 포인트가 세 개다. 포로민이라는 것, 모르드개의 족보, 그리고 정체성을 감춘 것, 이 세 가지다포로민이라는 것을 보자. 주석자들에 의하면, 6절에는 포로로 끌려왔다는 동사가 무려 4번이나 사용되었다. 한 절(verse) 안에 말이다. NIV와 개정, 새번역 등에는 고작 2번 밖에 안 나온다. 그러면, 포로 또는 유배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이다. 일반적인 것은 끌려왔다는 단어에서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주체성 상실이다. 타인의 의지에 의해, 타인의 땅에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애굽의 노예와 바벨론 포로 사이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이 점이 에스더와 무슨 상관있는가? 에스더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부모를 잃었고, 모르드개의 수양딸이 되었고, 왕비 후보자로 뽑혀 왕궁에 이끌려 들어갔다. 그리고 모르드개의 요청으로 자신의 민족을 살리는 투쟁에 빨려들어간다.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그 앞에 나아갔다가는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가련한 여인이다. 어느 하나, 그녀가 원해서 하는 것은 없다. 어느 하나, 그녀를 주체적 인간으로 묘사할 만한 것이 없다에스더서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에스더적 인간이 되라고 말하는가? , NO! 잠시 후에 보겠지만, 그녀는 은근히 능동적이다. 그건 그때 보도록 하고, 앞의 맥락과 연결 짓는다면, 그것이 왕이 원하는 여성이 아니었던가? 그저 남 보다 이뻤다는 것 하나만으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양귀비가, 그리고 수많은 왕비와 후궁들이 단지 자신들의 신체적 조건만으로 절대 권력에 다가갔을까?

이번에는 특수한 면을 보자. 내가 나의 첫 책, <공격적 책읽기>와 최근 책인 <불완전한 삶에게 말을 걸다>의 서문에 밝혔듯이 (그러니까 유배라는 키워드는 나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에게 유배지는 두 가지가 없는 곳이다. No Temple! No State! 며칠 전에 읽은 리 비치의 <유배된 교회>(새물결플러스)에서 저자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땅이다. 그러나 나는 땅을 국가에 집어넣어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땅이라는 주제가 구약성서에서 아니 성서 전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땅이 땅만으로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부동산투기와 다를 바 없다. 바로 하나님 나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성서이기 때문에, 땅은 국가라는 단어에 편입시켜도 좋다고 본다요지를 애서 간략하게 말해 보자. 1) 바벨론 땅에서 성전이 없으니 제사가 없고, 제사를 드릴 수 없으니 제사장도 없다! 2) 바벨론 땅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국가가 없으니 왕도 없고, 왕이 없으니 충성할 곳도 없다! 그러니까 종교적 제의나 의례, 그것들의 총화요 총합이 예배인데, 공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곳이 바벨론이요, 지금의 페르시아 제국이다. 그러니까 국가가 없으니 국가에 대한 충성을 바칠 곳이 사라졌고, 이스라엘 국가의 총화요 총합인 다윗 왕조가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왕되심을, 즉 하나님의 통치를 믿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에스더서에는 일체의 종교적 행위가 등장하지 않는다. 예배도 없고, 율법도 없고, 도덕적 계명도 없고, 기도와 찬양도 없다. 하나님의 이름도 아예 없다. 딱 하나 등장하는 것이 금식인데, 그때 이야기하겠지만, 종교적 용어를 완전히 다이어트해서 묘사할 뿐, 종교적 의미를 배제한 채, 그냥 금식이라고 했다. 요는, 예배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 성전 백성이 될 수 있는가? 그 답의 하나가 에스더서이다. 여기에 우리는 다니엘, 에스겔, 40장 이하의 이사야의 이름을 호명할 수 있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자의 원조는 창세기의 요셉이다. 이것은 나중에 이야기하자.

모르드개가 잔인한 폭군이자 무능력 독재자인 크세르크세스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었던 것도, 암살 음모를 사전이 인지하고 고발한 것도 저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다음 본문이므로 여기서는 pass!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구절이 있다. 예레미야 291-7절이다. 바벨론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 그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 또한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다. 다만, 신신당부하고픈 것은 그 본문을 한 번 이상, 두서너 차례 읽어달라는 것이다. 유배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면, 왜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구태여 밝히지 않고 감추었는지를 자연스레 해명이 된다. 나는 이것을 직장인에게 적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그러니까 회사라는 곳은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있어서 페르시아처럼, 다니엘에게 바벨론 땅과 같다. 단적으로 말하면 회사는 교회가 아니다. 예배하는 곳이 아니고 찬양하는 곳이 아니고, 기도하는 곳이 아니고, 성경 읽는 곳이 아니다. 회사 일을 하는 곳이다.

한번은 미션계 고등학교에 가서 인문학과 글쓰기 강의를 했다. 강의 전에 교목과 교감선생님과 맛난 식사와 맛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교목이 물었다. “교감 선생님, 학교에서 기도하고 기도실을 만들어달라고 하는데, 학교가 그런 곳입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학교는 학교일을 하는 곳이지요.” 교감 선생님 대답에 다시 교목이 말한다. “그렇지요. 기도할 시간 있고, 성경 읽을 시간 있으면, 학생들 상담하고, 교안 준비해야지요. 왜 그런 걸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원.” 그렇다. 그곳은 유배지다.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하는 그대로 직장에서 해도 되고, 마땅히 해야 되는 그런 곳이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온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곳이다. 하나님을 입으로 말하면서도 몸으로, 즉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애들 표현대로 노 답이다.

한편, 에스더와 선배인 다니엘 등이 보여준 유배지에서의 삶의 양식과 생존 방식은 기뻐 춤을 출 일이 아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어찌 시온의 노래를 부르리오, 라는 이스라엘의 애통과 한탄처럼 한 맺힌 아픔이고 슬픔이다. 에스더 더러 자신의 민족과 혈통을 감추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모르드개의 마음에는 피울음이 있다.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어쩌다 에스더가 유대인임을 암시하는 말과 행동을 살짝 보였을 때, 호통을 치는 모르드개를 말이다. 숨죽여 울지 못하게 하고, 볼기를 치는 모르드개 말이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그 자신도 숨죽여 우는, 남 몰래, 에스더 몰래 소리 없이 우는 모르드개가 보인다다른 한편으로,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창조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새로운 길을 찾고 길을 열어가는 선교, 미션, 사명을 수행하는 광활한 공간이다. 에스더는 그 좁고 협착한 길 위에서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않고, 막힌 길을, 없던 길을 만들어 가며 길을 개척했다. 부디 에스더를 읽고 또 읽어 하나님이 없는 이익을 신으로 삼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말하고 노래하는 새 길을 열고, 그 증인이 되기를 바라나.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에스더에게 정체성을 감추며 살라는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어떻게 양육했을까? 유대인의 정체성 교육을 하지도 않으면서 페르시아인으로 살도록 훈육했을까? 감추며 살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앙적, 종교적 정체성을 엄히 가르쳤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니 자녀 교육을 등한히 하는 것을 합리화하지 마라!! 더 나쁘다!!

이 본문의 세 가지 키워드 중에서 두 개, 포로민이라는 것과 정체성을 숨긴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모르드개의 족보를 들여다보자. 그곳에서 우리는 첫째, 그의 가문에 대해서 알게 된다. 베냐민 지파라는 것과 그의 조상들의 이름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속한 지파와 조상들이 이름이다. 사울왕과 관련된 것들이다. 게라의 아들 시므이는 다윗을 저주했던 이름이고, 기시는 사울왕의 아버지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족보에서 언급된 이름은 친부, 조부, 증조부의 것이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선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왜 그런고 하니, 나중에 등장할 하만이 사울이 대결했던 아각사람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때 사울이 살려주었던, 그래서 사무엘로부터 버림받게 된 결정적 사건의 문제의 인물인 아각 자손의 후손이 바로 에스더서에서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대결하는 하만의 조상인 것이다. 벌써부터 심장이 쪼여오고 쫄깃해진다. 그때는 베냐민 지파요 기시의 아들인 사울은 실패했는데, 같은 베냐민 지파요 기스의 후손인 모르드개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대결을 펼칠 것인가?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인가?

두 번째는 그가 페르시아에 온 연도가 여고냐, 곧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끌려올 때 왔다는 것이다. 이건 해석이 어렵다. 왜냐하면, 그때가 남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인 B.C 597(?)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잡혀서 왔다면, - 그때 다니엘도 끌려왔다. - 그 무리들은 유다의 엘리트 그룹이었고, 당연히 모르드개도 귀족이고 엘리트 출신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그가 왕궁 문에 있는 것과, 그가 최후에 페르시아 제국의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에 오른 것과 연결된다. 아무 실력 없고, 영빨만 쎈 사람이 대제국의 총리 자리를 맡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세 번째는 그때 그가 끌려 왔다면, 지금은 BC 4f90<??>>인데, 계산하면 대략 120살 정도가 되어야 한다. 다니엘처럼 10대에 이주했다면 말이다. 10살에 110년을 더하면 그렇게 된다. 그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면, 모르드개는 3세대나 4세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도 그곳에서 났거나 태중에 왔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앞에서 말했다. 적대적인 유배지에서 종교적, 민족적, 인종적 소수자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존할 것인가? 그리고 생존을 넘어 생명의 삶을 살 것인가?

 

4. 본문설명(8-18)

아이고, 이러다가 책을 쓰겠다. 너무 재미있다. 그치만 이 부분은 조금 줄여서, 긴 본문을 앞의 것 보다 간략하게 설명해도 되지 싶다. 사실적인 부분 보다는 의미에 초점을 두려한다. 이하의 내용은 수많은 젊은 여성을 징집(징집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당하는 스토리는 그냥 그대로 읽으면 된다. 그러나 그들은 왕비가 되지 못하면 평생 과부로 살아야 한다. 모 아니면 도다. 개중에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야망에 찬 이들도 있겠지만, 국가와 왕의 명령에 따라 가족과 고향을 등지고 낯설고 물설은, 음모와 배신으로 가득찬 왕궁에 자원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각각의 여성 하나만으로 장편 소설은 너끈히 나오리라.

포인트만 말하자. 9절을 보라. 내시요 책임자인 해개가 에스더를 좋게 보고 은혜를 베풀었다고 하였다. 이 번역에 따르면, 헤개가 주도적이고 에스더는 수동적이다. 그런데 히브리어로는 정 반대다. 에스더가 헤개의 마음에 들게 행동했다, 라고 쓰여있다. 와우!! 우리는 그녀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이 텍스트에서 직접적인 증거를 갖고 말하기 어렵다. 여백을 우리가 채워야 하고, 행간을 읽기 위해 땀 흘려야 한다. 나는 이럴 때, 소설가나 드라마 작가들이 한없이 부럽다. 그들처럼 소설을 쓰고 싶다. 에스더의 주도면밀한,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고 유순한. 어찌보면 이쁜 것이 꼬리치고 다니는 꼴로 볼 수도 있는. 얼굴만 이쁜 에스더가 아니라 소위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에스더의 재발견이다. 에스더서가 흥미진진해진다.

헤개가 다른 후보자에 비해 더 좋은 것과 별채 등을 제공하는 데에도 에스더의 노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 어쩌면 그가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서 요구했을 수도 있고, 그의 단짝 친구들이 작당했을 수도 있고, 등등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성경을 읽으면, 너무 신난다!! 이렇게 해석하는 내 나름의 근거는 있다. 앞에서 살짝 암시했다. 그녀는 자기 정체성을 감추고 살 지혜, 능력이 있다. 착하고 순한 에스더인 줄 알았는데, 모르드개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수양딸인 줄 알았는데, 자기를 감추며 살 줄 안다는 것. 의외로 에스더는 엉큼하다. 폐위된 와스디와는 전혀 딴 판이다. 대놓고 항명하지 않고 엉큼하게 자기가 필요한 것들 다 챙기는 똑똑하고, 아니 영악하다, 에스더는. 그런 에스더라면, 헤개에게도 능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증거가 또 하나 있다. 다른 후보자와 달리 왕의 침소에 들면서 다른 어떤 것도 헤개에게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건 에스더의 순수함이 아닐까? 그렇게 봐도 된다. 이 부분은 유대교 학자인 요람 하조니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나의 에스더 해석에 7할을 기대고 있는 그는 <에스더서에 나타난 하나님과 정치>(홍성사)에서 에스더가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한다. 뭐라고? 전략적이라고요? 그렇다. 그는 헤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헤개의 지상과제는 이 일을 잘 끝마쳐서 왕에게 신임을 받는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왕의 마음에 꼭 드는 여성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 그렇다면, 그가 여인들에게 준 물품과 재료들은 왕의 취향에 안성맞춤인 것들이다. 그런데도 다들 왕의 호감과 호의를 얻기 위해 더 달라고 요구하고, 뭔가를 빼고 뭔가를 덧붙인다. 그러면 땡이다. 헤개가 하라고 하는 대로 하는 것이 장땡이다. 그걸, 에스더가 했지 말입니다, 그 어려운 것을요. 바로 이것을 잘 간파한 것이 에스더라는 거다.

, 서두에서 왕이 원하는 배필에 대해 이야기했다. 와스디 같은, 그러나 와스디 같지 않은. 그저 왕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교태를 부리면서 왕의 지시에 절대복종하는, 그래서 하조니의 주장을 빌리면, 왕의 지배욕구를 만족시키지만 에스더서에서 지배욕 혹은 통제, 컨트롤은 무지 중요한 단어이다. - 성취감은 얻지 못한다. 외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내면적인 강인함이랄까, 강함 혹은 외유내강의 온유함이 있어야 한다. 유배지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사는, 그야말로 들풀이요 잡초에 다름 아닌 에스더가 적격이다. 그러니 그가 간택된 것이다. 에스더서가 묘한 것이 성적인 측면을 아주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또 하나, 부족한 해석 하나. 대다수 주석은 우연으로 돌린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그러면 재미 없다. 그러면 에스더서를 읽을 필요가 있느냐 말이다. 하나님이 다 하셨다? 에스더는 그저 꼭두각시인가? 인형처럼 웃고 있으면, 하나님이 짠 하고 나타나서 이뻐 보이게 만들어서 왕후로 삼게 하느냐 말이다. 그건 신데렐라 이야기이고, 그런 건 현실에 없다고 단언해도 좋으리. 꿈꾸지 마라. 그건 개꿈이다. 꿈을 꾸었다면 그 꿈에서 절대로 깨지 마라. 너무 아프다. 그런 식으로 믿으니 세상에서 판판이 깨지는 거다. 실력도 능력도, 하다못해 빽도 없으면서 무슨 배짱인지 목사도 아닌 것이 자기가 목사인 줄 알고, 교회가 아닌 회사가 교회인 줄 알고 행동한다. 그걸 간증이라고 떠든다. 당신이 사장이라면 놔두겠는가. 에고.

교회 와서는 정반대로 행동한다. 상명하복 문화에 쪄들어 조금이라도 윗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시키면 절대 순종이고, 자기가 좀 잘 낫거나 위라고 판단하면 어김없이 갑질이고, 이것저것 말로 시킨다. 목사도 아닌 것이 목사처럼 행동하고, 예수님도 아니면서 예수님 이상으로 거룩하게 말한다. 거북하다, 거북해. 어휴. 꿈꾸지 마라. 여기는 바벨론이고 페르시아이다, 예루살렘이 아니다. 아니, 예루살렘은, 성전은 더는 없다. 모르드개가 극진히 에스더를 돌보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역시 작은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말이다. 이 점이 무엇과 연결되는가 하면, 에스더서의 주인공이 에스더인가, 모르드개인가라는 물음이다. 둘 다 혹은 모르드개에 무게를 실어주어도 무방할 정도다.

 

5. 닫는 말 : 나는 누구인가?

할 말을 위에서 다 했다. 본문을 읽는 관점과 방법에 대해서 말했고,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에스더서 전체가 지금 여기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신선하고도 낯선 진리를 일깨운다. 불편하고 불온할 수도 있지만, 창조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게 하는, 놀라운 성경이다. 이제 와서 실토한다면, 내가 존 요더에 홀딱 반한 것은 그의 논문 하나를 읽고서다. Exdous and Exile이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나는 내가 사모하는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아니 그 책 제목에서 유배지라는 말이 서럽게 싫었고, 사무치게 좋았다. 내 부산살이가 유배지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리고 약용이 18년이 지나고 해배되어 서울로 돌아갔듯이, 나도 18년이 지나면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갈 것이다, 라는 뭐 말도 안 되는, 근거 없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늘 했다. 아무한테도 말 안했지만. 실은 서울역에서 내 사랑하는 딸과 만나 두 시간 동안 밥 먹고 커피 마시고 놀다가 잠실로 가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6절에 포로로 끌려왔다는 대목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나도 내게 은혜를 받은 놀라운 생각을 했다.

에스더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책이다. 다른 모든 성서는 귀향을 전제로 한다. 예레미야도 70년이 지나면 돌아온다고 했고, 다니엘은 그 말씀을 붙잡고 씨름했고, 이사야는 정답게 외쳤다. 복역의 기간이 끝났고 돌아갈 것이라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유배민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복원하는데 힘을 쏟았다. 단 한 사람, 단 한 성경인 에스더와 에스더서만이 그곳에 끝까지 남아 있다! 이 점이 에스더서 묵상과 연구에 아주 중요한 포인트이리라. 또 하나 실토한다면, 내 부산살이와 에스더서가 이렇게 연결될지 몰랐다. 글을 쓰면서 알았다. 에고, 눈물 난다. 에스더서가 나를 위한 성서로구나.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로구나. 하여, 나는 에스더다! 내가 누구라고? 에스더! 너는 어디서 사는가? 에스더처럼 유배지! 어떻게 살 건데? 에스더처럼, 에스더가 열어놓은 길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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