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은혜, 믿음, 공동체
[이택환] 은혜, 믿음, 공동체
  • 이택환
  • 승인 2018.12.23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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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눅 1:39~45
시모네 마르티니(1333)
Simone Martini, (1283~1344), 수태고지(1333)

대림절 네 번째 주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에 대해서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이해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지요. 천주교는 오래 전 5세기경부터 마리아에게 테오토코스’, 즉 하나님을 낳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개신교에서는 매우 낯선 신학용어를 사용해왔습니다. 개신교의 관점에서는 마리아를 신성시하는 불경한 용어로 들리겠지만, 테오토코스는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그분의 신성을 강조하는 용어였습니다. 또 천주교는 6세기부터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교리도 지켜오고 있지요.

그런가 하면 최근 20세기에는 마리아가 승천했다고 하는, 마리아 몽소승천(蒙召昇天) 교리 및 마리아 중보 교리까지 생겼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에게 기도하면 하나님께 더 빨리 상달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개신교가 볼 때는 비성경적이며, 심지어 우상숭배 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마리아 숭배를 두고 성부, 성자, 성령에 이어 성모를 덧붙인 소위 성사위일체로 가자는 것이냐는 비판도 합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공경하는 목적이 첫째, 마리아 그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 높이는 것이다. 둘째, 마리아의 신실한 믿음의 모범을 본받기 위함이다. 라고 말합니다.

보수적인 개신교일수록 이 말을 잘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천주교에 대한 반발인지는 몰라도, 마리아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합니다. 그 결과 천주교 신자들은 거의 매일 마리아를 챙기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일 년에 딱 한번 성탄절과 관련하여 마리아를 챙길까 말까하지요. 그래서 마침 성탄절을 이틀 앞둔 주일인 오늘에서야, 우리도 마리아에 관한 성경말씀을 대하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모세나 다윗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는 것처럼, 마리아에게도 배워야 할 훌륭한 신앙의 유산이 분명히 있지요.

마리아가 살았던 당시 유대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 구약시대의 맨 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둡고 추운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깊다는 것은 곧 새벽이 멀지 않음을 뜻합니다. 가장 추운 때가 동트기 직전이라고도 하지요?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약속을 이루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도 무명의 한 여성을 통해서 말이지요. 그 여성이 살던 곳은 당시 세계의 중심지 로마 제국의 수도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유대의 수도도 아니었습니다. 유대에서도 이방인의 땅이라고 부르던 저 변방 갈릴리 나사렛 동네였지요.

Giordano, 동정녀의 결혼(1688)
Giordano, 동정녀의 결혼(1688)

하나님은 그곳의 한 가난한 시골처녀 마리아를 통해 엄청난 일을 행하셨습니다. 장차 온 세상에 해방과 자유, 사랑과 정의를 가져오게 될 놀라운 일들을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한 여성을 통해서 행하셨던 것이지요. 그렇게 마리아는 인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연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지요. 그래서 천사 가브리엘도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라고 인사합니다(1:28). 마리아 역시 하나님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고백했습니다(1:48). 이처럼 성탄은 가장 비천한 자를 높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사람 차별하면 안 됩니다. 또 자신을 비천하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은혜란, 사전적으로 사랑으로 베풀어 주는 혜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사람의 은혜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마리아 외에 또 한 명의 여성 엘리사벳이 등장합니다.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은 원래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성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정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수치였습니다. 충만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어떤 면에서는 저주받은 집이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엘리사벳이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이를 가진 지 6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의 남편 사가랴는 명색이 제사장임에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할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아내 엘리사벳이 곧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큰 축복을 받았지만, “저는 늙은이입니다.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공동번역 개정 눅 1:18)” 불신한 결과, 결국 아이를 낳기까지 말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로또 당첨 소식에 깜짝 놀라서 반신불수가 된 격이었지요!

Leonardo da Vinci, L'annunciazione(1473~5)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의 아이는 장차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 부부의 아이는 이 땅에 오실 바로 그 하나님이셨지요.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사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가 결혼하기도 전에 임신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라는 계시를 믿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였습니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요셉의 믿음도 대단한 믿음인데, 여성들을 위한 복음서로 알려진 누가복음은 요셉보다 마리아의 믿음을 더욱 강조합니다.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천사가 요셉이 아닌 마리아에게, 그것도 꿈이 아닌 생시에, 직접 나타나 이야기 합니다(수태고지).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리고 요셉이 아닌 마리아가 이 사태를 스스로의 믿음으로 대처합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 탄생 이야기의 백미는 마리아의 믿음에 있습니다. 45절에서 엘리사벳도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 즉 마리아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또 그것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해서, 만사가 형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에는 늘 시련이 따릅니다. 마리아의 경우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미혼모라는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약혼자 요셉도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워 조용히 파혼을 고려할 정도였습니다. 21세기에도 미혼모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데, 하물며 미혼모를 돌로 쳐 죽이던 당시라면, 누구라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가 이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엘리사벳을 소개해 줍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1:36-37).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또 그 은혜를 감당할 믿음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문제를 함께 나눌 누군가와의 교제와 공동체적 나눔이 요구됨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요즘 교회 공동체를 떠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저는 회의적입니다.

마리아는 그 어린 나이(15세 정도?)에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그녀는 천사가 떠난 후, 급히 일어나 친척 엘리사벳을 만나러 갑니다. 먼 길을 여행하면서, 마리아는 아마도 천사의 계시를 먼저 경험한 엘리사벳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 인사합니다. 그러자 웬일입니까?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기쁘게 나아와, 마리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축복의 인사를 큰 소리로 외쳐 말했습니다.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아마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한두 살 먹은 아이도 아닌데, 네가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질렀느냐? 태중의 아이는 약혼자 요셉의 아이도 아니고 도대체 누구 아이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텐에 이 일을 어쩔 것이냐?”고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Lorenzo Monaco, 방문(1405)
Lorenzo Monaco, 방문(1405)

하지만 성령 충만(41)한 엘리사벳은 과연 달랐습니다. 그녀는 놀랍게도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를 향해 자신의 주라고까지 높이고, 자신에 비해 턱없이 어린 마리아를 오히려 주님의 어머니라 부르며 반겨 맞아줍니다. 엘리자벳이 마리아에게 일어난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지요. 마리아는 성령 충만한 엘리사벳을 만나 무려 3개월간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와 함께, 하나님께서 장차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것을 꿈꾸며, 새로운 힘을 얻어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날 소위 성령 충만하다는 사람들에게서도 무례와 요란함이 아니라, 이런 본질을 꿰뚫어보는 진짜 성령 충만한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를 통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미천한 갈릴리 나사렛의 한 무명의 여인 마리아를 택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마땅히 받은바 그 은혜를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약속에 대한 굳은 믿음, 오랜 시간이 걸려도, 큰 시련을 겪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지,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신실하신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우리 역시 신실해야 하는데, 우리가 늘 이 부분을 놓치고 삽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믿음의 시련들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에게는 고립된 삶이 아닌 영적 교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단지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만 하다가 흩어지는 세상의 흔한 만남과는 다른, 성령 충만한 성도들의 교제, 비록 두 세 사람이 모일지라도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교제처럼, 서로 위로하고 축복하면서 동터오는 새 시대를 미리 내다볼 줄 아는, 그런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교제가 절실합니다. 바로 우리 교회가 그런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 소망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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