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주 안에 선 그리스도인”
[이택환] “주 안에 선 그리스도인”
  • 이택환
  • 승인 2018.12.19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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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빌 4:1-7
고대 빌립보 전경 ⓒMarsyas CC BY-SA 3.0

인생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소한 일보다 중요한 일일수록 더욱 그러하지요. 가령 오늘 점심에 무엇을 먹을 것인가와 같은 사소한 일은 얼마든지 계획대로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이것은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임에도, 대부분 처음 계획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첫사랑은 실패한다.”입니다(물론 예외가 있겠지요?). 또 어떤 직장에 다닐 것인가? 역시 결혼만큼 인생에 중요한 문제지만, 역시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이 어떻게 하다 보니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하지요.

하나님의 일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원래 소아시아 동쪽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길이 열리지 않아요. 그러던 어느 날,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도우라는 환상을 봅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고, 바다 건너 아시아의 반대쪽 유럽으로 갑니다. 그래서 그가 유럽에서 처음 세운 교회가 마게도냐 빌립보교회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귀신들린 여자 점쟁이 노예의 귀신을 쫓아냈다가, 매를 맞고 투옥됩니다. 그런데 그날 밤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려도, 그가 도망가지 않고 간수를 전도하지요.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가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이후 바울은 어쩔 수 없이 빌립보를 급히 떠났지만, 빌립보교회는 그 후에도 바울에게 여러 차례 재정 지원을 합니다. 그래서인지 바울이 특별히 사랑했던 교회가 빌립보교회였어요. 그 교회에는 바울이 전도한 유명한 자주 장사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역할이 컸을 겁니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루디아를 사랑했다, 심지어 그녀와 결혼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의 일정 가운데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다시 감옥에 갇혔을 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이번에도 헌금을 마련해서, 에바브라디도 편에 바울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바울의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시중들러 온 에바브라디도가 중한 병에 걸리지요. 바울은 에바브라디도의 치료를 위해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면서, 그의 편에 함께 보낸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데는 세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투옥에 대한 변명입니다. 빌립보 교회성도들 중에는 어째서 복음을 전파하던 주의 종이 실패하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는가?”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러나 자신의 투옥은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될 것임을 역설합니다(1:25)

왜냐하면 그가 아무 죄가 없음에도 감옥에 갇힌 이유를 알게 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용기를 얻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비록 감옥에 매여 있을지라도, 복음은 매이지 않는다, 힘주어 말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두 번째 목적은 거짓 복음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가 빌립보교회를 떠난 후, 거짓 교사들의 들어와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이 손할례당이라고 한 것을 보아, 그들은 할례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모든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거짓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강력히 경고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세 번째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고 주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주 안에 서라는 것으 문자적으로 앉거나 눕지 말고, 서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니지요. 굳게 참고 견뎌라,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 안에 서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바울은 빌립보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실제적인 사례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첫째, 성도들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권하노니’(파라칼레오),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을 품다’(프흐로네오), 서로에게 애정을 두다, 관심을 기울이다, 주목하다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좋은 사이가 아니라, 교회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질 정도로 커다란 반목과 갈등 중에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는 없지만, 옥중에 있는 바울이 두 사람에게 부디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호소할 정도면, 결코 적은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주 안에서 굳게 서서 지켜나가야 할 삶의 방식을 따라야 했습니다. 주 안에서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는 이유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된 지체의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머리의 지시를 받는 손과 발이. 서로 제각각이어서는 한 몸이 될 수 없지요.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게다가 지금 두 사람은 평상시처럼 좋은 사이가 아니라, 대판 싸우기라도 한 양, 반목과 갈등이 있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바울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3절 앞부분,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바울은 이 문제를 단지 두 사람이 해결할 문제로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교회공동체가 나서서 두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대부분 학자들은 네게 구하노니에서 너가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닌 빌립보교회 전체에게 하는 말로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그들 자신의 힘으로 화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람은 원래 마음이 있어도 스스로 하기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싸운 후 화해가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비록 서로 반목할지라도, 그들은 일찍이 나와 함께 복음에 힘쓰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

둘째로, 우리가 주 안에 서 있다는 것은 삶 가운데 기쁨이 있음을 말합니다. 일단 바울이 주 안에 서있는 것은 그가 지금 감옥에 있음에도,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있음으로 드러납니다. 바울이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바울은 4절에서 이를 재차 강조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의 강력한 표지 중 하나가 바로 기쁨입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묘사된 초대교회의 모습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또 사도행전 5:41절에도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는 말씀이 있지요. 한마디로 박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은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기쁨이 없고 일상 가운데 매일 짜증만 넘친다면? 그 사람은 어딘가 신앙에 큰 문제가 있으므로 반드시 점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기쁨(카이로)은 단지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사와 환영과 축하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항상 인사와 환영과 축하가 넘쳐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멀뚱멀뚱하다? 그런 교회는 정상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자신과 관련된 극히 일부에게만 관용을 알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셋째로 관용을 말하는데, 주 안에 서 있는 사람은 늘 관용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5a,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관용이란 너그러움과 온화함과 절제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적용한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관용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고 했는데, 자신에게만, 또는 자신과 관련된 극히 일부에게만 관용을 알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 또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종교가 다르고, 경제 수준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성적지향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관용의 원칙을 적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큰일입니다. 일부는 갑질까지 하구요.

우리는 바울이 왜 그리스도인의 관용을 말하는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관용이 멋있어서? 관용을 베푸는 사람의 인격이 훌륭해서? 아닙니다. “주께서 가깝기때문입니다(5b).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시작된 새로운 시대가 장차 주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되는데, 그 때가 가깝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물리적인 시간을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용은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리 거룩한 삶을 살았다 해도, 다시 오신 주님 앞에 서는 순간, 자신이 행했던 그 동안의 부끄러움을 생각하며, 우리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 제게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물론 주님이 우리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지금 나에게 그토록 필요한 관용을 과연 나는 이웃에게 그동안 얼마나 베풀었는가?”를 생각하면, 스스로 몸 둘 바를 모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용도 베풀 수 있을 때 베푸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끝으로,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염려보다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뢴다고 말합니다.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염려들에 포위되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염려 중에 실제로 염려할 만한 것은 전체의 8%도 안 된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 우리 염려의 92%는 염려할 필요가 없는 헛된 염려라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염려할 게 너무 없어 염려스럽다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해,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다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6절 말씀에서 비슷한 말을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런데 추가되는 말이 있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할 일이 생겼을 때, 그리스도인은 염려할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기도할 일이 생겼구나!”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물론 기도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간구는 물론, 심지어 금식기도에도, 우리를 억누르고 가슴 아프게 하는 상황과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 것은 본문 말씀이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을 약속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지난한 과정입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천 번 만 번 옳다는 사실에 완벽하게 동의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참 평안이 찾아옵니다. 7절에서 바울은 그것을 우리의 모든 지각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입니다. 이제 정리합니다. 주 안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가? 첫째, 주 안에서 서로 같은 마음을 품는 사람입니다. 서로 다투었을 지라도 화해하십시오, 또 화해가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 둘째, 항상 기뻐하십시오. 셋째,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십시오. 끝으로 매사에 염려보다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우리 모두 주 안에서 굳게 선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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