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충성하는 주인, 불충한 종
[이택환] 충성하는 주인, 불충한 종
  • 이택환
  • 승인 2017.11.1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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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목사의 설교 - 마 25:14-30

오늘 말씀은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외국으로 오랜 기간 여행을 떠나면서, 세 명의 종을 불러 자신의 재산을 맡겼습니다. 각자의 재능(뒤나미스, 능력)을 따라 첫 번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두 번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세 번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우리는 주인이 매우 세심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달란트를 맡기되 아무렇게나 맡기지 않고 각자의 재능을 따라 맡겼습니다.

혹시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그렇다면 내 재능이 요것 밖에 안 된다는 말이냐?” 불평이 나올 법합니다. 그러나 저 같으면 그런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달란트가 결코 적은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달란트는 약 15 년 치 근로자 연봉에 해당합니다. 원화로 환산하면 대략 5억 원 정도가 되는 큰돈이지요. 그러고 보면 주인은 자신의 종들을 정말 깊이 신뢰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5억(한 달란트) ~ 25억(다섯 달란트)이라는 거금을 절대로 그들에게 맡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5억, 10억, 25억이라는 큰돈이 주어지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즉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주인이 오랜 시일 후 돌아왔기 때문에, 그가 적지 않은 기간을 충성스럽게 일했을 것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도 그런 식으로 충성되게 일해서 두 달란트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돌아온 ‘오랜 시일’이 과연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요? 원문에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폴뤼스’하게 지난 후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알 수 없는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주인이 돌아와 종들을 불러 결산을 했습니다. 결산이라는 말에 헬라어 ‘로고스’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것은 단순히 누가 얼마를 벌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논리적으로 짚어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을 것을 네게 맡기리라,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칭찬받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도 똑같이 칭찬받습니다. 수십억 원을 다루는 일이 결코 적은 일이 아닐텐데, 주인은 그들이 ‘적은 일(올리고스, 아주 적은, 거의 없는)’에 충성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앞으로 그들에게 맡길 일이 어마어마함을 예상케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풍성한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카라, 기쁨)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 번째 종 차례입니다. 그가 주인에게 나아가 땅에 감추어 두었던 한 달란트를 되돌려주자, 주인이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심히 꾸짖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한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주인의 분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자신의 집에서 추방해 버립니다.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유이므로, 그가 단지 주인의 집에서 쫓겨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된 것을 보여줍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이 비유가 희극이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비극, 처절한 비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비유를 신중히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느냐, 아니면 거기서 배제되느냐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단지 재능계발의 중요성에 관한 교훈 정도로 취급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재능(달란트)을 주셨다. 운동 잘하는 사람, 노래 잘하는 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다재다능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달란트의 재능을 가진 보통 사람이 있고, 한 달란트의 재능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 달란트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절대로 비관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보시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잘 활용했는가를 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달란트를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또 그것이 적다고 낙심하지 말고, 그 시간에 자신의 달란트를 계발하는 데 힘써야 한다!”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계발 강사가 할 이야기지, 굳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며칠 앞둔 절박한 시점에, 한가로이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비유를 종종 자기계발 측면보다 교회에 필요한 은사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는 전도 잘하는 사람, 찬양 잘하는 사람, 봉사 잘하는 사람 등등 다양한 은사자가 있다. 교회를 섬기기 위해 각자가 받은 은사가 다양한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은사를 부러워하지 말고 자신의 은사를 귀히 여기고, 그 은사를 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당신이 맡기신 은사를 결산하신다. 작은 은사일지라도, 교회를 위해 은사를 잘 사용하여 유익을 남긴 사람은 상을 받고, 큰 은사일지라도 땅에 파묻은 사람은 꾸지람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역시 말이 안 됩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인데, 마지막 때 결산하신다는 것도 그렇고, 또 모든 초점이 지나치게 교회의 기능에 맞춰져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가 말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 비유에는 세 명의 종이 나오지만, 사실 두 부류의 종만이 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 이 양자가 구분되는 지점은 달란트를 추가적으로 남겼느냐 못 남겼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결과일 뿐이지, 결과를 가져온 본질적 요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맡겼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맡기다’라는 말은 ‘파라디도미’, ‘전적으로 위임하다’입니다. 주인이 종들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큰돈을 그들에게 전적으로 맡긴 것입니다. 적어도 주인이 없는 동안 그 돈은 종들의 소유와 다를 바 없습니다. 주인과 종들 사이에는 그런 상호신뢰의 계약이 이미 체결되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 때, 착한 종이라면 당연히 주인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자신의 재산처럼 신실하게 운용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주인의 계약을 믿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는 주인을 굳은(완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24-25절). 심지 않은 데서 거둔다는 것은 투자도 하지 않고 이익을 챙긴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27절에서 주인을 이자 놀이나 하는 악한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주인이 어떻게 당시 율법이 금한 이자놀이를 할까? 하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하지만 27절은 26절과 같이 보아야 합니다. 26-27절,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27절의 ‘그러면’은 “네가 나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악한자로 알았다면”입니다. 즉, “네가 나를 그렇게 악한 자로 알았다면, 너는 내가 좋아할 것 같은 불법 이자놀이라도 했을 텐데, 너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주인의 계약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주인에게 전혀 충성하지 않은 것이지요. 주인이 볼 때, 그는 주인이 그에게 먼저 보여준 신뢰를 저버린 악한 종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에 이처럼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리고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나라에서 배제되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단지 먼 훗날에 일어날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일어났고, 또한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은 달란트나 재능이 아닙니다. 교회에 필요한 은사도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장사해서 남겨야 할 이익도 아닙니다. 충성입니다. 충성은 곧 신뢰요 믿음입니다. 착한 것(아가도스, 선하고 좋은 것)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비유의 주인이 먼저 종들을 신뢰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신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충성하신 것입니다! 그 사실이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여러분, 달란트의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충의 길에 들어섰음에 대한 그분의 탄식과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당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충성이 필요한 그 시점에, 모두 그분을 배반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다시 주님께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이 되어 우리에게 이 비유를 전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불법적인 교회세습은 결코 하나님께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자들은 날마다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될 것입니다. 단순히 배제된다기보다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기를 날마다 거부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분은 이 비유를 말씀 하신 후 사흘 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친히 당신이 바깥 어두운 데 내던져지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글쓴이 이택환 목사는 그소망교회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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