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찬] 어떻게 하면 자존감이 생기는가?
[손성찬] 어떻게 하면 자존감이 생기는가?
  • 손성찬
  • 승인 2018.11.26 1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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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57~62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인플루엔셜, 2014년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 인플루엔셜, 2014년

서점에 나가서 최신의 책들을 둘러보면, 사람들의 관심사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어요. 뭐 요즘은 굳이 나가지 않아도, 클릭 몇 번이면 온라인서점을 통해 살펴볼 수 있지요. 그렇다면 요새 어떤 책들이 관심을 받을까요? 한마디로 이거에요. ‘괜찮아’. 표현과 방법만 다를 뿐, 결국 위로와 격려를 해주고, 어떻게 사는 게 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지를 얘기해주지요. 그런데 이런 현상이 조금 슬퍼요. 결국 많은 이들이 심리적 문제로 허덕이고 있다는 방증이니까요. 물론 더 슬픈 건 우리 중에는 그런 책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는, 난독증 환자들이 많다는 사실이에요그런데 좀 재미있어요. 가장 많은 에너지를 받아야 하는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스트레스만 받고, 전혀 나를 모르는 이의 일반적인 위로 문구로 공감을 받는 이 아이러니함이요. 아무튼 이처럼 어떻게 자존감을 세우는가?’라는 질문에 특별히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접근들이 많이 이루어지거든요. 제 나름대로 후려쳐서 단순하게 보면 세 가지의 접근법으로 귀결돼요.

우선 모든 딜레마의 원인이 당신의 과거에 있다는 얘기에요. 심리학의 시발점이자, 근대 인문학에 한 획을 그었던 프로이트’. 현재의 아픔은 과거의 트라우마들에 기인한다는 설이에요. 특히 성장기별로 충족되어야 하는 일명 성적 욕구들이 있는데, 이게 무시당하거나 뒤틀려지면 트라우마처럼 형성되어 그 사람을 괴롭힌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 양반은 너무 성적코드로만 해석해서 좀 과장되어요. 두 번째는 요새 우리나라에서 주목받는 아들러라는 학자의 접근인데, 그의 심리학에 기반한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초 베스트셀러였잖아요. 안 보셨으면 꼭 보세요. 저 이거 보고 아주 많이 은혜받았어요.

프로이트가 과거에서 모든 원인을 찾았다면, 아들러는 바꿀 수도 없는 과거는 그냥 두고, 오직 현재를 더 강력하게 조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중심으로 어떻게 이 세상에 대응할 것인가?’라는 맥락으로 말하여요. 마지막으로는 미래에 중심을 두는 접근방식이지요. 셀리그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제창된 <긍정심리학>이에요.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제 느낌에는 미래에 보다 더 무게를 둔다고나 할까요? 이러한 각자 다른 원인분석이 있기에 해결방법도 달라요. 프로이트는 과거의 나쁜 경험을 끄집어내어 직면시키고, 무의식의 반영인 꿈을 분석하지요. 아들러는 자기 객관화와 더불어 자기가 세상의 중심임을 강조하고, 셀리그먼은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하고 조망하는데 무게를 두곤 합니다. 이러한 분석이 미비할 수 있지만 대략 이런 맥락이에요. 그리고 무슨 '심리학'이냐 하며 무시할 게 아니라, 이 대학자들의 통찰들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어요. 도움을 받을 필요도 있고요.

다만, 그런데도 저는 감히 이런다고 자존감이 세워질까?’라는 반기를 들어요. 조금 현실적으로 얘기해볼게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세요. 부모님 간의 관계, 부모가 나를 대했던 방편들, 자신의 외모, 성취에 대한 경험 등. 전체적으로 봤을 때, 깜깜하면 사실 자존감 잘 안 생겨요. 과거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때문에 자존감이나 심리학관련 서적을 아무리 탐독해봐도 잠깐인 것 같아요. 과거의 망령이요. 그리고 제가 바라본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요. 내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세상이 주는 환경과 조건들이 너무 유동적이에요. 그래서 스스로 잘 조절해서 좋아지는 것 같더라도, 외부적 압력이 훅 오면 훅 가버리더라고요. <미움받을 용기>보고 은혜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훅 간다니까요.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저는 자존감이란 소위 잘 돼야 생기는 것으로 생각해요. 성취에 대한 반복적 경험이 과거를 극복하게 만들지요. 되게 관대해지고 사람이 커집니다. 그러나 그게 쉽나요? 이 때문에 잘 되어 회복되는 건 정말 소수일 뿐이지요. 그래서 또 다른 방편을 제시하자면, 도전하고 실패해도 끊임없이 지지해주는, 즉 사랑해주는 이의 존재가 가능케 하겠지요. <나의 아저씨> 박동훈 부장처럼. 그러나 우리 알잖아요. 슬프게도 이런 사람 거의 없죠.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한 영역이 있어요.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 그런데 그 전능하시고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 이토록 초라한 나의 삶의 모든 여정을 주관하신다는 것에 대한 실존적 믿음이 신앙적 자존감을 형성케 합니다.

길게 얘기했는데, 결국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심리학적 접근들은 결국 다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할 나의 과업으로 귀결시킨다는 거예요. . 이런 식이면 결국 자존감 회복 못 하는 것도 노력을 하지 않는 너의 책임이에요. 하지만 타인, 혹은 신과 같은 타자의 존재가 외면된 채 자존감 회복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아무리 나를 잘 제어해도, 주변이 협조하지 않으면 결국 지옥이거든요. 결국 다 같이 잘되지 않는다면, 다 같이 사랑하지 못한다면 소수는 괜찮을 수 있어도 다수는 고통스러워요. 이 때문에 차라리 불교의 그것처럼, 즉 모든 고통을 유발하는 관계의 지옥인 속세를 떠나 산속에 들어가 혼자 수양하는 게 훨씬 합리적인 방법이에요. 거기 가면 이런 비루한 내 입에서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통찰이 나온다니까요.

마찬가지예요. 마치 내 자존감에 대한 질문처럼, 신앙에서도 비슷한 질문에 제시될 수 있지요. ‘내 신앙은 어떻게 회복되고 고양될 수 있는가?’ ‘다른 말로 어떻게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분명한 건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전제가 잘못된 접근은 그 어떤 현란하고 따뜻한 방식이라도 잘못된 것이거든요.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께 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에요. 이유가 있어요. 이미 놀라운 사건들을 많이 행하셨지만, 10~17절에 기록된, 우리에게도 너무 유명한, 그 당시 너무 화젯거리였던 오병이어사건 때문이에요. 이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대해 주목하게 하는 놀라운 사건이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또 다른 유의 충격이 있었어요. 마치 유대인들이 죽고 못 사는 최고의 인간 모세가 생각나거든요.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그 메시야는 바로 이집트에서 해방했던 그 강력한 지도자 모세 같은 이였어요.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마치, 이집트에서 탈출 후 들어간 메마른 광야에서 먹을 게 없을 때, 하늘에서 내린 만나의 기적이 연상되는 기적이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소름 끼쳐. 바로 이 사람이 제2의 모세. 아니, ‘메시야다!’하면서 엄청난 기대감을 가지고 물려오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중에 나도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는 이들이 많아졌어요. 그러나 본문은 제자가 되려던 세 인물의 예시를 통해 잘못된 신앙접근방식에 대해서 알려줘요.

첫 번째 사람이 예수께 말합니다. 57.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동문서답이에요. 58. 바람직하진 않지만, 우리나라에도 전임 대통령들을 비하할 때 쓰는 동물용어가 있었잖아요. 뜬금없이 등장한 이 여우라는 말이 바로 그런 거에요. 교묘한 학살자 헤롯왕을 지칭하는 비하의 은어예요. 당연히 여우 굴은 헤롯의 왕궁을 가리키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정작 본인은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즉 이 사람은 오병이어를 체험하고, 메시야 대망론에 사로잡혀, 예수께서 로마를 뒤집어엎고 헤롯 궁을 탈취하며 왕권을 거머쥐실 것을 기대하며 찾아온 그의 속마음을 끄집어내시는 것이죠. 결국 예수님의 답변은 나는 그것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제자는 세상의 영광과 승리를 얻기 위해 따르는 자가 아니라는 뜻이자, 그런 제자 거절이에요.

이미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9:46 . 일명 누가 크냐논쟁. 얘들도 오병이어를 봤거든. 그래서 예수께서 왕권을 거머쥘 것이라고 예측하며, 미리 서열 논쟁하는 거에요. 똑같잖아요. 결국 어디든지 따르겠다는 위선적 고백 아래 숨겨진,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내가 가고 싶은 데까지만 따르겠다는 심보가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그러나 지난 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인 압제자인 로마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지 않았습니까? 왜요? 백부장은 예수께 주님이라고 외치며, ’가라 하면 간다.’고 말합니다. 즉 아무리 죽을 자리라도 주인의 명에 의해 가는 임전무퇴의 백부장의 말은 참으로 진실하기 때문이지요.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어디든지 따라갈사람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 첫 번째 사람은 이미 주님이 아닌,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부터 무효예요. 여러분.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내 버스에 예수를 태우는 게 아니라, 내 버스에서 내려 예수님 버스로 갈아타는 것이에요. 운전대를 맡기는 자기 주권의 포기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포기하고 희생하고 위험을 직면할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믿고 가는 거예요.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세요.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따릅니까? 예수님? 아니면 소위 천국 표 얻으려고?

두 번째 사람을 소개합니다. 59. 이번엔 독특하게 예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라며 먼저 부르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지금도 부모의 장례는 인륜지대사지요. 그런데 당대에는 신앙적 무게가 더해져서 더 강렬해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을 지키는 방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특히 아버지의 장례였거든요. 그런데 뜬금없이 예수께서 또 이상한 발언을 하세요. 60.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우선 조금 더 당대의 장례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관에 넣어 보통은 동굴 무덤에 넣어요. 그리고 3일 동안 애도 기간을 가지고, 시신은 무덤 안에서 약 1년 동안 부패 돼요. 그런데 이 애도 기간 동안 상주는 자리를 벗어나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그 후 유골을 관과 무덤에서 꺼내 유골함에 넣고 다시 땅에 묻는데, 이것으로 장례절차가 완전히 종료되어요. 결국 이 1년이라는 애도 기간을 얼마나 잘 지켰느냐에, 자기 부친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그리고 제5계명을 지켜냄으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건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자신을 따르라고 하세요. 좀 심한 표현 같지만 은유적 표현이에요. 그 생명이 다한 죽은 방법’, 즉 여전히 율법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 방법을 고수하려는 소위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하게 하라는 의미에요. 반대로 부름을 받은 당신은 그러한 과거의 신앙방식과 단절하고, 예수와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을 따르라는 선언이지요. 그 새로운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뭐요? ‘하나님 나라

죽은 사람들의 가르침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아주 다릅니다. 앞에서 언급한 자존감을 어떻게 키우는가?’라는 질문과 연동돼요. 결국 이건 너만의 과제이니, 네가 죽자고 노력해야 나아진다.’로 끝나잖아요.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 해소되나요? 유대인들이 얽매여있던 죽은 사람들의 가르침이 바로 이러한 심리학적 접근, 그리고 이와 같은 선상에 있는 종교라 불리는 것들과 비슷해요. 심리학이나, ‘종교라는 것은 결국 나만의 과제이잖아요. 내가 잘해서 구원, 즉 천국, 즉 사후세계를 얻어내서 거기 가는 것이에요. . 철저히 만 남아요. 그러나 이런 체계라면 나에게는 복일 수 있지만, 타인에게는 복이 아닙니다. 그런 작은 게 무슨 진정한 복인가요? 이처럼 자기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모습에 세상 사람들이 질려버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솔직히 그것조차 안 믿는 것 같아요. 더 많이 현세적 복을 얻어내려는 그 이중적 행태에 진저리 치는 거지요. 아니요. 이것들과 반대되는 하나님 나라는 전혀 다른 문제분석과 치유책을 내놓지요. ‘하나님 나라는 고작 나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을 정도로 무가치하거나, 나 하나 구원받기 위해 이기적이어도 되는 것은 아니에요.

지금 말고 죽기 직전에 믿으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 정말 자주 듣거든요. 두 번째 사람의 딜레마가 이 질문에 다 담긴 것 같아요. 그러나 이 질문은 우선 믿는 타이밍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담겨있고, 기독교 구원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만 축소 켜버려요. 동시에 자신이 죽을 타이밍을 스스로 예측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며, 해볼 것 다해보고, 내가 그때 예수를 수단화하겠다는 이기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질문이에요. 이처럼 그냥 나 하나 구원만 받으면 된다는 이런 종교심에 근거한 신앙은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복음과 관계없어요. 그 때문에 그런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음이 역설적으로 증명됩니다. 아니요. ‘하나님 나라는 죄 세력의 지배를 받아 죽어가는 세상, 죽어가는 사람들과 대립하는 매우 크고 모두에게 복된 이야기에요. 나만 구원받으면 장땡인 이야기가 아니라, 죄의 지배를 받아 죽어가는 타인과 이 세상까지도 더불어 하나님 나라로 전환하여 샬롬에 거하는 이야기에요.

 

이번엔 세 번째 사람입니다. 61.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선문답을 하세요62.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12:1. 너는 네가 사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라’. 우리는 핵가족 사회, 일인 가정 시대를 살기에 이 명령이 잘 와 닿지 않지만, 고대사회에서 자기가 태어난 고향, 아버지의 집, 친인척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전부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태어난 곳, 자라난 곳, 거기서 관계한 친인척이 일종의 한 인간의 생존과 삶의 복락을 보장하는 모든 것이었지요. 결국 하나님의 명령 핵심은 바로 그것들로부터 떠나, 내가 보장해주고, 내가 인도하는 즉 하나님 나라로 들어와 살라고 요청하신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거기에 순종했기에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어요. 그 때문에 여기서 집안 식구들이라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말씀하셨던 맥락이에요.

물론 과거에 엘리사선지자가 엘리야를 따를 때는 가족들에게 작별인사하고 가는 장면이 등장해요. 그 때문에 인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에요. 하지만 예수님은 아셨던 것이지요. ‘집안 식구들과의 작별 가운데, 결국 그들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예수 따름을 포기하게 되리라는 것. 혹은 예수를 따르다 힘들면, 나중에 결국 다시 집안 식구들에게로 돌아갈 것을요. . 늘 마음이 거기 있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켜요. 지난주 말씀 중 나누었던 구절이지요. 8:2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들이다." . 사람에게 가족이란 누구나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로 떠올려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아버지로 하는 새로운 가족을 맞이한다는 사실도 분명 포함되거든요. 그런데 여전히 집안 식구들만이 내 가족이라는 상식에 머물러 있다면 당연히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지요. 가족이면 꼬락서니를 참지만, 가족이 아닌데 내게 조금이라도 불편할 것을 참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래서 다시 62.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경작할 때는 보통 두 마리의 소 가운데 쟁기를 달아서 활용해요. 그런데 쟁기를 양손으로 잘 잡고 균형을 잘 맞추어 가는 일이 쉬워 보이지만 엄청난 집중력을 요해요. 조금이라도 한눈팔면 난리가 나요. 씨를 잘못 뿌리면 그 씨만 죽지만, 쟁기질을 잘못하면 온 밭이 난리가 납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구도를 약간 축소해 교회에 적용해볼까요? 교회에 뒤를 즉 세상을 돌아보는 사람이 많다면 어찌 될까요? 여기서 세상은 세상의 오락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마치 집안 식구들과 같이 자기가 의지하는 믿을만한 무엇, 즉 우상을 얘기해요. 연약한 우리가 어쩌다 볼 수는 있으나 계속 뒤만 보면, 그 밭은 결딴납니다. 나만 죽는 게 아니라 여럿 죽어요. 또한 자기는 집안 식구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에 많다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여럿 죽어요. .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을 두 군데 두거나, 무신경해도 될 만큼 무가치하지 않아요.

 

이렇게 세 사람의 소개를 마칩니다. 그러나 이게 종교적 희생을 강요하는 듯하게 다가오지 않았으면 해요. 왜냐면, 이 본문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않은 8~9장 사이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 사건들의 결론이 뭐냐면, 예수의 제자로서 따르는 자, 즉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 이를 전파하는 자들이 얻게 될 하나님 나라의 복락의 프로토타입들이 그려져요. 우선 아까 10~17절의 오병이어사건. 이 사건은 예수님이 초월적 신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누누이 얘기했잖아요. 역설적으로 거기에 몰려든 수많은 백수와 먹을 것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굶주렸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요. 그런데 그 많은 이들이 순식간에 모자람 없이 풍성하게 먹었어요. 즉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경제적 고통으로부터 그 누구도 굴복당하지 않는 물리적으로 차고 넘치는 풍성한 곳이에요. 자기가 복을 쟁취하기 위해 영광을 얻기 위한얻기위한 목적으로 살지 않아도, 자기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해질 것이에요.

그리고 37~42절에는 소년에게 들려있는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이 등장해요. 앞선 8:26~39절까지는 거라사 광인이라 불리는 군대 귀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양의 귀신이 지배하고 있었던 자 안의 귀신들을 깔끔하게 전부 쫓아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마귀의 지배 아래 고통받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하나님이 다스림으로 샬롬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두루뭉술한 얘기 같지요. 저는 자존감 얘기할 때 말씀드렸던, 어린 시절 당했던 좋지 않은 경험들. 혹은 과거에 자발적으로 저질렀던 윤리적 문제들. 이런 게 마귀가 가장 잘 부리는 약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기억과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샬롬만 남습니다.

이어지는 8:40~48절에서는 어떤 의사도 고치지 못했던 십여 년간 고통받던 혈루병 걸린 여인의 고질병을 예수께서 깨끗이 치유하셨어요. 하나님 나라는 아픔과 고통이 완전히 사라질 것임이 확인되지요. 거기에 이어져 있는 사건. 즉 죽어버린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는 사건은 더 의미심장합니다. 모든 사람은 그 아이가 죽었다고 외치고, 이미 죽어버린 뒤 도착한 예수를 비웃으며, 그 아이의 죽음을 종결과 안녕으로 보았지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52 . ’울지 말아라.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그리고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아이야, 일어나라’’ 죽음이라는 최악의 고통과 슬픔과 단절은 더는 없고, 단지 자는 것만 있을 뿐이지요. . 우리는 이 몸을 입을 채로 부활합니다. 아마도 그 부활한 몸도 잠을 잘 것으로 생각해요. 분명한 건 자는 것은 있어도 죽는 것은 없어요. . 하나님 나라는 죽음 그 자체를 넘어서는 곳입니다. 진정 그러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그것과 대립하는 죄의 지배를 받아 생겨난 결과물들. 즉 아픔과 고통과 죽음, 결핍, 귀신의 지배에서 벗어나, 선함과 풍성함의 충만으로 가득한 샬롬의 자리입니다. 이게 우리에게 약속하신 나라입니다.

그 온전한 결과물이 일명 변화산 사건이지요. 9:29 . 예수께서 지금 죽어서 가셨거나 마술을 부린 게 아니라, 예수께서 발을 디디고 계신 곳에 일시적이지만 하나님 나라가 실존적으로 임한 것이었어요. . 종말에 우리도 같은 것을 누릴 것이에요. 아니, 그때만이 아니라, 예수를 진정 따르는 제자들의 진실한 발자취들이 모인다면 오늘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귀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요. 피곤하고, 때로는 포기하고 버리고 싶은 게 당연해요. 그러나 제자됨의 어려움에 집중하지 마시고, 그가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와 완성될 그 나라에 집중합시다. 우리 시험공부 힘들잖아요. 그런데 왜 할 수 있습니까? 그 시험을 잘 통과하여 얻게 될 영광 때문에, 참고 견디고 버텨내는 것이잖아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영광이 준비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게 진정한 자존감 아닙니까? 자신이 죽었다 깨나도 얻어낼 수 없는 성취. 이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 그분이 나의 인생을 조망하며 인도해가시며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법들로 채워주시며 이끌고 가시는 그 놀라운 사랑. 훗날 분명히 얻게 될 거하게 될 그 어마어마한 나라에 대한 확신이요.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현재형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큰 자존감입니다.

가장 멍청한 짓은 역사의 가정이라고 합니다. ‘만약에라는 말이요. 아니지요. 예수를 믿는다면, 믿기로 결단했다면 결코 뒤를 돌아다보지 마십시오. 만약 자신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거나, 알쏭달쏭하다면 제가 돕겠습니다. 그리고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 나라를 기쁨에 겨워 전파합시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프로토타입이 되는 우리 이음숲교회’. 아직 미비한 게 많아요. 해결하고 풀어나가야 할 것도 많고요. 가끔 힘들기도 한데, 그래도 노력하는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건네 듣다 보니 감사하기도 해요. 우리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함께 우리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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