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밖으로 나간 그리스도인들
성벽 밖으로 나간 그리스도인들
  • 정한욱
  • 승인 2018.11.24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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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세속성자 - 성벽 밖으로 나간 그리스도인들, 북인더갭, 2018년
양희송, 세속성자 - 성벽 밖으로 나간 그리스도인들, 북인더갭, 2018년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운동가인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는 일본의 유명한 애니매이션인 「진격의 거인」이야말로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우화라고 말한다. 한국 개신교의 주류는 성벽 바깥에 즐비하다고 여기는 ‘기독교의 적’에 대해 대응하는 유일한 해결책이 더 안쪽의 성벽으로 도망가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3년부터 가나안 성도를 위한 ‘세속성자 수요모임’을 이어오면서 그들이 던진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 전반을 재검토하는 과정을 거쳐온 저자는 이 책에서 현실세계에 성벽을 쌓아 안팎을 성과 속으로 구분하고 이를 분할통치하는 방식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벽 내의 불신과 맹신을 드러내고 성벽 바깥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인 세속성자(a secular saint)라고 주장한다. 예언자적 통찰로 가득한 이 책의 본문을 요약한 후 간단한 단상을 덧붙인다.

 

1부 세속성자란 무엇인가

왜 세속성자인가  ‘세속성자’란 세상 속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A christian in the world)의 다른 표현이다. 성도라는 널리 쓰이는 표현을 놔두고 굳이 성자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피상적 교회론에서 비롯된 집단주의적 폐해를 극복하고 제도교회를 떠난 200만에 육박하는 가나안 성도들의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집단으로서의 성도’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성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제도권 개신교의 붕괴 현상이 가속화되고, 다양한 비제도권 기구를 통한 새로운 대안모색의 노력들이 활발해지며, 보수 신앙인들이 완고한 정교분리 원칙을 깨뜨리는 사회적 각성을 경험하는 등 2000년대 초반부터 이어진 일련의 변화에 반응하면서 새로운 모색을 위해 노력해 온 이들의 자리가 바로 ‘세속성자’의 자리다.

성수의 부패냐 파리의 성화냐  성경은 성도에게 거룩/성스러움을 요청한다. 거룩에 이르는 전형적인 방식은 부정한 것의 목록을 만들어 끊임없이 제거해나가는 ‘정화’이나, 이는 매개자인 종교인이 매개되는 내용인 신보다 선행하면서 신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매개의 역설’에 빠지거나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부정한 대상을 설정함으로서 새로운 차별과 혐오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오히려 거룩이란 끊임없이 세속으로부터 오염과 부패의 위협을 당하느라 전전긍긍하는 유약함이 아니라 가장 부정한 곳조차도 거룩하게 만드는 ‘강화’의 능력이며, 세속성자란 당대의 거룩/성스러움에 대한 인식에 정면으로 배치됐던 예수의 ‘십자가 길’과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서 세상 속에서 거룩성을 구현했던 ‘바보성자’들의 모범을 따라 세속과 일상의 세계야말로 거룩이 구현되어야 할 장으로 인식해 끊임없이 세상으로 침투하고 씨름하는 자들이다.

‘가나안 정복’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라  탈근대 시대인 오늘날에는 제도 종교의 언어가 현실과 괴리된 시대착오적 허사가 되고 있는 반면, 세속의 가치체계나 언어 안에 종교성이 새로운 양상으로 구현되고 있다. 또한 구약에서 신약을 거쳐 그 이후 역사까지 살펴보면 기독교 신앙은 ‘가나안 정복’으로 대표되는 성속이원론으로만 귀결되지 않으며, 예수의 사역에서 절정에 이르는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와 실천 위에서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거룩을 향한 추구는 단순히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들어가기를 청하는 공간적 분리의 방식이 아니라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오는 세대의 가치를 따라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으며,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것은 세상을 버리고 교회로 돌아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도들이 어떻게 일상의 시공간 속에서 다른 방식의 삶을 살 수 있는지 일깨우고 독려하는 일이어야 한다.

영원이 아니라 찰나를  기독교 신앙은 이 땅의 삶을 저급하게 여기고 초월적 이데아의 세계로 비약해 ‘시간을 초월한 거룩’을 추구하기보다, 육체를 입고 시간 속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추상에서 구체로 영원에서 찰나로 이동해 지금 여기에서 ‘시간 속의 거룩’을 추구하는 삶이며, 부패하기 쉽고 결함이 많은 원초적 삶의 조건을 인정하고 이와 더불어 살되 이를 넘어설 다른 가능성을 추구하는 삶이다. ‘공간의 신앙’은 거룩의 영역이 세속의 영역을 정복하고 확장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지만 ‘시간의 신앙’은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종말론적 가치의 선제적 향유를 동시에 추구하며, 세속과 일상에서 성스러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특정한 삶의 방식이나 성품과 같은 구체적 실천으로 귀결되기에 소비행태와 같은 ‘라이프스타일’의 문제야말로 세속성자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2부 불가능한 것들 - 세속성자의 믿음 · 기도 · 예배 · 전도

믿음 - 나는 믿지 못합니다.  믿을 대상이 없고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어 무신론자나 ‘막신론자’가 양산되는 상황을 넘기 위해서는 믿음이란 원래부터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하며 특정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나 성실한 수행을 통해 자동적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믿음은 명사라기보다는 동사 즉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이며,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처럼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처절하게 인정하면서 고투해온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단지 예배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행동을 본받는다는 의미이며,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면서 그리스도의 신실함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내용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믿음이란 개인으로서의 성도 각자가 그 예수가 보여준 신실함을 따르는 것이다.

기도 -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기도하는 것과 그 요청이 이루어지는 것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기도가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하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실존적으로 기도가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순간을 겪게 된다. 세상의 모든 기도는 채 언어가 되지 못한 탄식에서 출발하는 ‘무지한 기도’이고, 발화자의 요구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에게 속한 비주체적 행위이며, 기도자의 의지를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동기화’나 그 뜻을 이루시라는 ‘강청’에 가깝다.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자신을 드러낸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성 안에서 시작되며, 그 목적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구하는 것임을 가르친다. 기도에 있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절대량이지만 많은 기도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자기성찰’과 ‘하나님 이해’이며, 좋은 기도는 반드시 구체적인 일상의 삶을 향할 뿐 아니라 반복적으로 다져온 기도자 각자의 독특한 언어의 궤적이 담긴다.  

예배 -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라면  예배는 단순히 성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성찰과 이해와 헌신으로 하나님과의 대면이라는 형용모순/실천 불가능성과 싸우는 일이며, 모든 예배는 몸을 통하지만 그 물질적 구체성은 그것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너머의 차원을 지시한다. 예수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다루는 예배를 가르쳤고 메시야의 도래를 원형으로 하는 새로운 예배를 지향했기에,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통해 ‘살아있는 기억’ 그 자체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기억하고 반복적으로 몸에 새기도록 요청받으며, 이 일은 특정 예배 형식에 제한됨 없이 상상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실천될 수 있다. 진정한 영적 예배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를 위해 산 제물이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발생하는 경외감을 앞에서 말을 줄이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전도 -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고, 교회의 성장이 곧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라는 성장주의 논리를 따르게 되면 결국 세일즈와 세뇌 행위가 전도/선교를 대체하게 된다. 그러나 전도나 선교 역시 다른 종교행위와 마찬가지로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불가능의 영역에 속하며, 그 일차적이고 핵심적인 과제는 그것이 사람들의 기존관념을 거스르고 당대의 상식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주어진 말씀과 가르침을 왜곡 없이 전달하는 것이다. 전도하는 성도들에게 맡겨진 책임의 범위는 문을 두드리기까지이며 그 음성을 들려주는 것과 더불어 거하시는 것은 주님의 몫이다. 궁극적으로 전도와 선교는 개종자를 얻기 위한 전략의 문제라기보다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지를 논하는 존재양식으로 여겨져야 한다.

 

한국의 주류 기독교에 더 이상 외부에 존재한다는 가상의 적에 대한 책임전가나

땜질식 미봉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급격한 격변과 붕괴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

3부 남겨진 것들 - 하나님 나라 · 교회 · 영성 · 공공선

천당 말고 하나님 나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자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는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통치)는 세상의 제도와 구조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따라 도발적이고 전복적으로 나타났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 나라 그 자체와 동일시했던 그 나라의 구현자였으며, 예수의 메시지에 반응한 사람은 어떤 계급, 인종, 성별, 나이, 직종에 속해 있건 그 나라의 일원으로 환영받았다. 주기도문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에 다름아니며, 그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종말을 맞아 휴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일용할 양식을 먹고, 죄 짓고 빚진 자를 용서해주며, 시험에 들기보다는 악에서 건짐을 받는 삶을 뜻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림인 바실레이아를 지상적으로 대리하고 그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에클레시아는 언제든 스스로를 재구성하고 갱신할 자세를 지녀야 한다.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신약에서 사용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원래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 상설된 영구조직이 아닌 목적을 달성하면 해산하는 한시적 모임을 의미했으며 모이는 방식에는 전혀 제약이 없었다. 교회란 모종의 종교적 울타리 안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는 곳이며,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절실한 분별력은 바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디에서 어떻게 발견하는가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크고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하나님의 행하심은 ‘하나님의 선교’로 간주될 수 있으며, 선교적 교회론의 핵심은 하나님의 선교가 벌어지는 그 현장에 에클레시아가 발생한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선교가 일어나지 않는 곳에 에클레시아는 부재하거나 단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가나안 성도를 정죄하는 용도로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가나안 성도들이 우리 시대의 에클레시아가 되기를 강력하게 요청하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일과 쉼이 있는 영성  영성이란 성령 안에/아래 사는 삶이다. 세속성자에게 영성은 종교생활을 위한 주말 영성이 아니라 일상을 위한 주중 영성이며,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인 일과 쉼(노동과 놀이)를 제대로 포괄해야 한다. 이 중 노동의 영성이나 영성적 실천으로의 노동은 진공상태가 아니라 한국 사회라는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 노동이 처한 구체적 현실 안에서 논의되어야 하며, ‘정직과 성실’이라는 개인적 노동윤리의 차원을 떠나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수행하는 삶을 가로막는 권력과 체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는 질문에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영성은 자기 내면과의 관게, 타자와 맺는 친밀성의 관계, 타자와 맺는 사회적 관계라는 세 가지 층위를 담아낼 수 있는 포괄적 전망이어야 하며, ‘희년’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 속에서 고스란히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제기되고 있는 주제들이 우리 시대의 노동과 부와 권력을 향해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숙고할 수 있어야 한다.

절박한 가치 공공선  교회론은 단순히 지상교회의 조직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늘의 뜻을 쫒아 자기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노력과 관련되며, 이들이 사회적 모순과 고통을 해결해 나가는 하나님의 대리적 공동체를 자임한다면 혁명과 개혁을 위한 최상급의 자원이 될 잠재력을 품은 강력한 대안/대조사회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기독교적 기반이 세속성에 의해 해체되면서 신앙 실천의 장이 교회냐 사회냐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진 탈기독교 사회에서, 교회는 기존의 교회론으로 포착되거나 설명되지 않고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지만 세상에 기독교적 가치와 영향력을 구현하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방식(기체 교회)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당대에 대한 급진적인 대항적/대안적 비전의 공급처였던 교회는 한국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최저선의 합의 수준인 공공선을 이루기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후기와 개인적 단상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의 주류 기독교에 더 이상 외부에 존재한다는 가상의 적에 대한 책임전가나 땜질식 미봉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급격한 격변과 붕괴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위기를 인지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사역자, 지도자란 위치에서 내려와 성도로서 개인의 자리에 서보는 인식론적 이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집단이나 권위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추구하는 ‘신앙의 개인성’과 삶의 한시성을 적극 끌어안고 동시대성을 받아들이며 현실에 강렬하게 개입하는 ‘거룩의 시간성’을 회복한 “세속성자”들의 등장만이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깊이 공감되는 주장이다. 그러나 집단주의적 신앙과 공간적 성속이원론을 뼛속까지 체화한 채 전통적인 “고체교회” 이외의 어떤 신앙형태에 대해서도 적대적 태도로 일관하는 장년층 이상의 대다수 보수교회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에게 과연 저자가 외치는 파숫군의 음성이 얼마나 도달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이미 도끼는 나무뿌리에 놓였다. 낡은 가죽부대는 정녕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을 것인가?  과연 다 타고 남은 그루터기만이 미래의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으로 남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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