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인문주의자인가?
나는 왜 인문주의자인가?
  • 최종원
  • 승인 2018.11.21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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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를 원하는 시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1.

16세기 종교개혁 시기를 살았던 프랑수아 라블레(1494-1553)는 당대의 가톨릭 교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했던 프랑스 인문주의자이다. 그의 해학과 풍자, 비판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거침없이 표현되었다. 그의 저술은 무신앙을 도발한다는 혐의로 교회로부터 금서로 지정되었다. 라블레의 작품과 그의 시대를 통해 16세기의 종교 심성을 읽어내고자 했던 프랑스 역사학자 뤼시앵 페브르(1878-1956)는 라블레가 살았던 시대에서의 무신앙의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16세기는 심성적으로 무신앙을 체계화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는 그 시대를 믿기를 원하던 시대라고 표현했다. 다시 말하자면, 비판과 풍자는 불신앙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 더 나은 종교를 향한 희구였다.

비판과 풍자가 상상력을 통해 구현될 때 경계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끄집어 낼 수 있다. 중세 말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던 풍자문학들이 대부분 상상의 유토피아 세계를 그린 것이 그 반증이다. 만약 풍자와 해학을 통해 새로운 상상의 세계가 그려지지 않았다면 성사 중심의 천년의 가톨릭 전통을 깨트린 종교개혁은 불가능했다. 제도교회를 통하지 않고 직접 신과 교통할 수 있다는 상상력은 스콜라학의 교의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 성직주의를 깨트린 결과, 목회자의 결혼이라는 것도 등장했다. 신 앞의 인간의 존재에 대한 혁명적인 이해가 없었다면 성직자의 결혼이 허용될 수 있었을까? 비난, 비판, 풍자, 해학 그 모두가 반드시 반종교적이거나 무신론적일 수는 없는 이유이다.

 

교회 갱신의 한 가지 핵심은

인간에 대한 사고와 상상력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용기이다.

2.

그 실체는 모호하지만 오늘날 여기저기서 회자되는 인문학적 상상력에 잇대어 생각해 보자. 오늘날의 종교와 교회에 대한 비판, 비난, 풍자가 곧 반교회나, 무신론으로 연결될까? 가나안 신자들이 무신론자로 귀결될까? 교회의 컨텍스트에서 믿는다는 것은 정밀한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형상을 지닌 사람의 가치를 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헬라 철학의 인간관과 히브리 사유속의 인간 이해를 넘어서는 기독교의 인간이해가 혁명을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성직자와 비성직자의 차별을 끊은 종교개혁의 인간 이해가 인간의 가치를 신 앞에 단독자로 설 수 있는 데까지 높였다. 실제로 모든 시대의 혁명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재고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현재의 가시적인 교회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뭉뚱그려 휴머니즘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그것이 신학을 부정하는가? 그보다는 인문주의의 흐름이 보완적이 될 수도 있다. , 그렇지 않을 경우, 교의와 도그마 속에 인간이란 존재는 객체가 되고 틀 속에 압도당한다. 신학적 경계안에서 설명 가능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강박을 넘어설 수 없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문학의 비판의식과 풍자와 해학은 그저 과학의 잣대로 혹은 철학의 사유로 신학적 틀의 경직성을 비웃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정통적인 사고와 가치관을 넘어 새로운 사고의 실천까지 이어져야 한다. 당연히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신학구조의 변화도 촉구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종교개혁이 성취한 것 아닌가. 이를 부정한다면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늘의 신학적 틀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당연하게 교의학에 대한 틀을 재고해야 한다.

그 돌파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경계를 넘어서는 사고이다.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상상을 이끌어 내는 것이 인문학적 사유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사유의 핵심은 인간성에 대한 재발견이다. 모든 종교는 인간 가치의 고양을 통해 발전하였다. 고상하게 인문주의라고 하건, 교회가 금기시하는 인본주의라고 하건, 중립적으로 보이는 휴머니즘이라고 하건, 그 가치의 재발견과 제고가 없는 종교는 시대 속에 정합성이 없다. 그러므로 교회 갱신의 한 가지 핵심은 인간에 대한 사고와 상상력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용기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비판의식, 풍자와 상상력, 이것 없이 기존의 틀을 고수하는 것은 중세 말 스콜라학이 쏟아내던 무의미한 담론에 다름 아니다.

 

3.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위험을 직면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고 있다. 그 한 방편은 돈키호테처럼 가상의 적들을 만들고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무기는 모든 것을 신앙으로, 성경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신앙적, 신학적 정통이라는 미명 하에 횡행하는 이 환원주의는 내부 결집에 효과적일지는 모르나 위기를 헤쳐가는 가장 게으른 방식이다. 창조과학이건, 이슬람 혐오건, 여성에 대한 차별이건 그 모든 정당성이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라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가. 이 틀 속에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질식할 수밖에 없다. 이 틀을 벗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엄정한 신학적 사유보다는 품이 넉넉한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도 흔히 옮겨지는 헤르만 헷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로 거칠게 비유해 보자. 수도원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나 깊은 형제애를 나누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서로 극단의 캐릭터를 갖고 있다. 모두의 기대대로 나르치스는 탁월한 지성으로 수도원에서 사유를 발전시키고 결국 수도원장의 자리에 오른다. 반면 골드문트는 소위 세속적인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수도원을 나와 일생을 전전하며 다양한 삶의 경험을 한다. 조각작품을 만드는 일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던 그는 말년에 죽음을 앞두고서야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와 나르치스와 조우한다. 골드문트는 수도원에서 참회의 나날을 보내며 나르치스의 배려로 조각품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 골드문트의 완성된 조각품에서 나르치스는 그 어떤 신학적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종교적 경이, 숭고를 보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골드문트가 수도원의 회랑 내에서만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우리의 상상력은 체계화된 신학적 사유 속에 자라날 수 없다. 우리의 사고가 자유로운 상상력을 옷 입을 때 숭고미에 도달할 수도 있다.

 

여전히 우리는 믿기를 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때로 그것이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기성의 신학에 대한 해체적인 시각으로 표현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4.

정확히 1년 전 오늘, 오랜 고민 끝에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힘들고 외로운 밴쿠버 생활에서 조금이나마 인문학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했던 이 페북 글쓰기는 처음부터 그 의도와는 엇나갔다. 첫 글이 명성교회 세습을 인문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이었으며, 그 후로도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가 주를 이루었다.

거두절미하고, 내가 1년 동안 페이스북을 통해서 발견한 한 가지는 여전히 우리는 믿기를 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때로 그것이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기성의 신학에 대한 해체적인 시각으로 표현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난 역설적이게도 여기에서 희망을 본다. 비판과 비난, 신랄한 풍자 속에도 여전히 이 시대 예수의 가르침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우리의 신념과 배치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자 하는 깊은 갈망을 읽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희망을 실천하는 멋진 이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기독교 대학의 이념과는 엇나가게 인간에 대한 차별을 조장한 모교의 졸업장을 찢어 올리는 이에게서 불온함을 보기 보다는 크리스천 지성의 자존심을 볼 수 있었다. 타자에 대한 배제와 불편함이 일상화된 교회 문화 속에서 타자를 수용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추천 받은 장로직을 포기한 이도 보았다. 물론 어설픈 낙관론을 주장할 정도로 나이브 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사례는 수도 없이 열거할 수 있다.

오늘 우리 교회에 필요한 상상력이 무엇일까? 교회에 대한 관념적이고 당위적인 사고를 넘어서는 것이 그 출발일 것이다. 지금까지 여정의 작은 결론은 비난과 비판, 풍자에 머물기 보다 우리가 놓쳤던 또 다른 인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함께 희망을 찾는 것이다. 그에 목마른 수 많은 사람들을 본다. 적어도 내 눈에 그들은 누가 뭐라해도 믿기를 원하는 시대의 사람들이다. 차별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믿을 뿐 아니라, 우리가 신앙하는 이가 그 인간에 대한 존엄을 구현하기 위하여 스스로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인본주의자라고 불린다 해도 기꺼워할 자존심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종교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허위의식을 고발해 나갈 것이다. 비판과 풍자와 해학을 잃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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