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바로미터
복음주의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바로미터
  • 정한욱
  • 승인 2018.12.04 0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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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 · 크리스토퍼 라이트, 선교란 무엇인가, IVP, 2018년
존 스토트 · 크리스토퍼 라이트, 선교란 무엇인가, IVP,  2018년
존 스토트 · 크리스토퍼 라이트, 선교란 무엇인가, IVP, 2018년

복음주의 선교 운동과 신학의 발전 과정과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바로미터

『선교란 무엇인가』는 선교학의 다섯 가지 중요한 주제인 선교 · 복음 · 대화 · 전도 · 회심에 대해 한 세대 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균형 잡힌 이해를 제시했던 존 스토트의 고전 『현대기독교 선교』에 그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시대에 맞게 해설하고 비평한 내용을 덧붙여 완성한 일종의 확대개정판이다. 각각 로잔 언약과 케이프타운 선언의 입안자로 세대를 이어 로잔 운동을 끄는 핵심적인 지도자로 활약한 두 사람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논의는, 단순히 두 거장의 개인적인 견해를 넘어 그 자체로 복음주의 선교 운동과 신학의 발전 과정과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존 스토트는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에 관한 좋은 소식이고 전도란 이 소식을 다른 사람들과 말과 행동을 통해 나누는 일이며,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진정성과 겸손함을 가지고 타종교인들과 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구원은 일차적으로 질병으로부터의 치유나 사회 정치적 해방이 아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로부터의 구속이며,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죄에서 돌아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회심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선교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 속으로 보내셔서 하게 하시는 희생적인 섬김으로 복음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를 포괄하지만 복음 전도가 우선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에 대해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성경 이야기 전체가 복음을 구성하며, 성경적 구원이란 영-육과 현재-미래를 아우르는 총체적 실재라고 강조한다. 또한 ‘하나님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으로 만물이 그리스도 아래 하나 되고 죄로 인해 왜곡된 피조세계를 새로운 창조세계로 변화시키는 모든 과정을 포함하며,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이 위대한 목적을 완수하는 과업에 동참하게 해 주신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지만 교회의 전도를 받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내부자 운동’과 같이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볼 때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비판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자이자 후계자인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개인적 스승이자 복음주의 진영의 영적 거인이었던 존 스토트의 견해에 대해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이의를 제기하면서 새롭고 심화된 선교이해로 나아가는 모습은 참 멋지고 부러워 보인다. 과연 특정 신학자의 견해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사문난적’으로 몰아가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기독교 유생들로 가득한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계에서 이런 저작이 나올 수 있을까? 그나저나 젊은 시절 그렇게도 신선해 보였던 스토트의 글을 거의 한 세대만에 다시 읽으면서 그 보수성에 꽤 놀랐다. 그만큼 내 신앙의 지평이 넓어진 것일까, 아니면 ‘세속’과 ‘자유주의’에 물들어 타락해 버린 것일까?

정한욱

요약

선교(스토트)   선교가 오직 전도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전통적 이해가 한 극단이라면 반대쪽 극단에는 선교의 목표가 세상에서 샬롬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에큐메니칼 진영의 입장이 있다. 우리는 요한복음 20:21에 따라 선교의 본성이 교회의 본성이 아닌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며 최초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생각에 동의할 수 있다. 선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 속으로 보내셔서 하게 하시는 희생적인 섬김으로 거기에는 전도뿐 아니라 사회 정치적 행동이 포함되며, 예수님처럼 섬기도록 세상에 보냄받은 우리의 섬김도 말과 행동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사회적 행동은 단순히 전도의 수단이거나 전도의 표명이 아니며, 사회적 행동과 전도는 선교의 양 날개이자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독립되어 있는 ‘동반자 관계’이다. 그러나 교회가 곧 선교라는 말은 과장이며, 선교란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시는 모든 일을 아우르지 않는다. 오히려 선교는 교회가 세상 속으로 보냄 받아 하는 모든 일을 의미하며,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라는 교회의 이중적 섬김의 소명을 아우른다.

선교에 관한 고찰(라이트)    존 스토트는 보내셨고 보내시는 하나님만 언급했지만 성경은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해 중요한 목적을 지니고 성취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선교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여 주며, 선교란 보내는 행위나 대위임령 같은 극적이고 특별한 인간의 활동이기에 앞서 성경 내러티브 전체(성경의 전체 이야기)를 진전시키고 그것을 영광스러운 결말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화해를 이루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아래서 하나가 되게 하고 죄와 악으로 깨진 창조 세계를 더 이상 죄와 저주가 없는 새로운 창조세계로 변화시키는 일이며,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창조 세계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이 위대한 목적을 완수하는 과업에 동참하게 해 주신다는 의미다. 따라서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전도와 사회적 책임 뿐 아니라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까지 포함한다. 전도와 사회적 행동은 함께 가는 동반자라기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는 활동들의 통합 체계라고 할 수 있으며(통합적 선교 integral mission),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존재하므로 교회가 하는 모든 일에는 ‘선교적 차원’이 존재하지만 교회가 하는 어떤 일은 명확하게 ‘선교적 의도’를 지닌다.

전도(스토트)    교회가 희생적으로 감당하는 선교 사역에서 전도는 최우선이며(전도의 우위성), 전도의 본질은 결과나 수단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선포하는 행위 그 자체다. 전도란 다른 이들과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며 그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가 선포하는 예수님에 관한 좋은 소식은 구약과 신약의 증언대로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주와 구세주로 통치하고 계시면서 회개와 믿음을 명하실 뿐 아니라 회개하고 믿는 모든 이에게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과 인간의 삶 속으로 침투했다는 것이다. ‘선포’ 없는 ‘존재’가 없듯 ‘존재’ 없는 ‘선포’도 없으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하는 메시지뿐 아니라 교회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도 복음을 접한다.

전도에 관한 고찰(라이트)   ‘전도의 우위성’보다는 ‘복음의 중심성’이 더 중요하다. 이는 어려움에 처한 인간의 상태에서 시작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의 사역에 대한 성경 이야기에 먼저 집중한다는 뜻이며, 복음이라는 단어를 마치 몇몇 성경구절을 발췌한 구원계획으로 축소하거나 사람들이 죽을 때 천국에서 자기 자리를 보전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법칙으로 여기는 데서 돌아서라는 요청이다. 우리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며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스토트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창조에서 새 창조에 이르는 성경의 전체 이야기라는 틀에서 그 ‘그리스도 이야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 계시되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그리스도 중심인 소망으로 충만한 그 위대한 이야기 전체가 좋은 소식(복음)을 구성하며, 우리는 바로 이 좋은 소식에 믿음과 삶으로 참여하고 그런 다음 전도라는 복음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름받는다. 복음주의자들이 확신을 잃은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속해 있는 복음이 들어가 있는 그 전체 이야기를 잊었었을 뿐 아니라 복음의 이야기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세계관을 변화시키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의 시각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은 진리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악을 폭로하며, 하나님의 가족으로 새롭게 화해한 인류를 창조하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주적 능력을 가질 뿐 아니라 윤리적 변화를 낳는다.

대화(스토트)    복음은 선포되어야 할 뿐 대화의 주제가 될 수 없다는 전통적 견해를 고수하는 사람들과 어떠한 형태의 일방적 선포나 설교도 거부하는 사람들의 두 극단이 존재한다. 성경의 계시를 살펴보면 살아 계신 하나님은 직접 또는 예언자들을 통해 인간과 대화하셨고 예수님 역시 공적 사역 내내 개인이나 무리와 대화하셨을 뿐 아니라 바울의 선교여행에서도 대화는 그의 주요한 방법적 요소였다. 대화는 말을 할 뿐 아니라 듣기도 하는 진지한 소통이며 그 목표는 당연히 상호이해이지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랑의 제약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화가 전도를 위한 필수적인 예비 단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비기독교 체계에 진리의 요소가 있고 자연에 하나님의 일반 계시의 흔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런 것들이 구원에 충분하다거나 기독교 신앙과 비기독교 신앙들이 하나님께 이르는 대체 가능하며 동일하게 유효한 길들이라는 견해는 강하게 거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인과 대면할 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신념을 타협해서도 안되고 타협할 필요도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해야 하지만, 적대적이거나 거칠어서는 안되며 진정성 · 겸손 · 일관성 · 민감성을 지니고 기독교 신앙의 유일성과 진리를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고 그들을 존중하는 진실한 대화를 행할 수 있다.

대화에 관한 고찰(라이트)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 다원성이라는 사회적 사실과 상대주의적인 종교적 다원주의라는 이념을 세심하게 구분해야 하며,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만 배타적으로 발견된다는 ‘배타주의’의 패러다임에서 규정한 모든 요소를 고수하면서도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지만 어떤 형태의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구원할 수 있다(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해)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열려 있어야 한다. 이는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는 의미에서 ‘배타주의자’이지만 구원이 그리스도에 대해 들은 사람들, 다시 말해 복음화된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는 의미인 ‘제한주의자’는 아닌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비제한적 배타주의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 중 하나가 되도록 우리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혹은 실제로 우리 교파에 합류하도록 강요하려는 시도인 ‘개종’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본을 따라 복음을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선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복음에 대해 온전히 자유롭게 결단하게 하는 ‘전도’다.

구원(스토트)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고 예수님의 사역은 구원 사역이었으며 성경 전체는 구속사, 즉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다. 질병으로부터의 치유나 압제로부터의 해방 및 새롭고 더 나은 사회 창조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지만,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주고 계시는 그 구원의 구성 요소는 아니다. 사회 정치적 해방을 구원이라고 부르거나 사회적 행동주의를 전도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이 구별하는 것, 곧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하나님, 우주의 하나님과 언약의 하나님, 세상과 교회 일반 은혜와 구원하는 은혜 정의와 의롭게 되는 것 사회 개혁과 인간의 거듭남을 섞어 버리는 신학적 혼란의 죄를 짓는 것이다. 성경에서 구원과 언약은 항상 한 묶음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신약에서 출애굽은 정치적으로 압제 받는 소수에 대한 해방의 약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죄에서 구속 받는 것에 대한 이미지(모형)이다. 과거 시점에서 보면 구원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서 벗어나 아들이 되기 위한 자유를 얻는 것이고,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자기 중심성의 족쇄에서 해방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자유를 얻는 것이며, 미래의 측면에서 보자면 썩어짐의 종 노릇하는 데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우리의 변화된 삶과 생활 방식으로 구원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구원 메시지는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곧 우리의 메시지다.

구원에 관한 고찰(라이트)    선교 사역의 한 부분인 치유와 사회 정치적 활동을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내용에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가 구원 사역과 관련이 있기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선교 신학과 구원 신학 사이의 괴리를 낳는다. 그러나 온전한 성경적 구원은 영적 육체적 사회적 차원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실재이며,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보장 받을 수 있는 부분(현재적 영역)과 지금 여기에서 반드시 경험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새로운 창조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부분(종말론적 영역)을 아우른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의 수고, 긍휼, 중재, 정의 추구와 같은 선교적 참여를 행함으로 하나님이 가져다주시는 치유와 정의는, 하나님이 새로운 창조 세계에서 구속하신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신 궁극적 구원을 기대하게 하는 첫 열매들이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주권이 오직 교회가 복음 전도에 순종하느냐에만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며, 그리스도인의 명확한 전도에 반응할 이들만이 최종적으로 택함 받고 구속 받는 이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복음을 들고 다가가지 못한 이들을 하나님이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하실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교회의 선교와 전도의 의무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신뢰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표지는,

그것을 믿고 그대로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회중이다.

회심(스토트)    회심은 복음이 요구하는 응답 또는 그것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응답을 뜻하며, 우상과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믿음이 더해진 것이다(회심 = 회개 + 믿음). 이러한 ‘회심’은 흔히 ‘개종주의’라고 불리는 강압적이고 잘못된 형태의 전도나 요즘 유행하는 종교적 상대주의나 보편구원론의 유행 때문에 오늘날 인기 없는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과, 우리가 그 화목하게 하심을 받아들이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거듭남이 하나님이 하시고 무의식적이며 즉각적이고 완성적인 사역인 반면, 회심은 인간이 하는 일이고 보통 의식적이며 일회적 사건이라기보다는 평생 진행되는 과정이다. 회개를 선포할 때는 복음이 치러야 할 댓가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알리는 ‘진실성’과 ‘현실주의’가 필수적이다. 회심은 사람을 기독교 공동체 즉 교회로 이끌지만, 회심자를 반드시 세상 속으로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에서 본질적으로 악하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거부해야 하는 것과 선하거나 중립적이므로 유지하거나 변화시켜 풍성하게 만들어야 할 것을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도는 단지 배워할 할 기술이나 암기해야 할 공식으로 축소될 수 없다. 전도자는 오직 성령만이 사람을 회심시킬 수 있음을 기억하며 그 능력에 겸손히 의지해야 한다.

회심에 관한 고찰(라이트)    예수님을 주요 구주로 믿지만 그들의 이전 신앙 공동체 내부에 계속 남아 있거나 가시적으로 공식적인 기독교 교회에 합류하는 식으로 공동체를 떠나지는 않는 사람들의 운동인 ‘내부자 운동’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격렬한 논쟁이 있어 왔다. 그러나 가장 혼합주의적인 형태의 기독교와 함께 살아가는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하나님이 일하시는 전혀 다른 문화에서 무엇을 그리스도를 향한 진정한 충성으로 규정할 권리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예상치 못하거나 익숙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볼 때 성급하게 그것을 장려하거나 비난하려는 경향을 피해야 한다. 교회는 존재 자체로 복음의 필수 요소일 뿐 아니라 본질상 선교적이며 온 창조 세계를 그리스도 아래서 통일시키려는 ‘하나님의 선교’의 중심에 위치한다. 또한 교회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우체부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메시지의 구현이며, 복음의 신뢰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표지는 그것을 믿고 그대로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회중이다. 회심이란 문화 내에서 문화와의 역동적이고 피할 수 없는 교전 가운데서 일어난다. 우리는 성경과 문화를 구별하는 법과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거부해야 할 것과 수용해야 할 것을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스토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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