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정제된 은혜에 사랑을 더하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정제된 은혜에 사랑을 더하다
  • 김영웅
  • 승인 2019.03.15 0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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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누군가는 ‘은혜’라는 단어를 자신의 잘남과 높음, 그리고 상황의 잘됨으로 연결시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큰 은혜 받았던 때를 내게 묻는다면, 난 나의 못남과 낮음, 그리고 상황의 안됨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들을 말하지 않고는 도저히 내겐 ‘은혜’를 설명해 낼 재간이 없다. 여전히 지금도 일상 중에 ‘은혜의 구경꾼’으로 설 때가 더 많은 ‘부끄러운 나’이지만, 필립 얀시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나 역시 한없는 은혜의 수혜자였음을 다시 고백하게 만들어 주었고 감사를 회복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그러나 그 고백을 하기에 앞서, 나는 3년 전 클리블랜드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그 때의 암울했던 기억들을 소환해 내야만 했다. 단 몇 초만 생각해도 금새 우울해지고 아직도 아픈,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난 끝내 건져내어 졌지만, 모든 걸 다 잃을 것 같아 두려워 밤을 지새며, 극단적인 결단도 할 뻔했던 그 때의 기억들이 자꾸만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내게 있어 진정 ‘모든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깨닫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었고, 이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 잃어도 괜찮다’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의 인정은, 실은 내가 ‘다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또 잊고 있었다. 내가 Second Chance를 부여 받은, 수렁에서 건져 내어진, 죽었다가 살아난 죄인이란 것을 말이다.

고난의 정의를 ‘은혜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는 극적인 순간’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그 은혜는 철저하게 외부에서, 그리고 철저하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나는 갈증이 갈증임도 못 느끼는 탈수증 환자와도 같았다. 물만 공급되면 되는데,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인데도, 그리고 손만 뻗으면 물을 마실 수 있는데도, 그 필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다른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던, 오직 나로 가득 찼었던 인간이었다. 나 역시 우물가의 여인처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필요했었던 것이다. 은혜가 필요했던 것이다.

필립 얀시는 이 책에서, 교회에게만 기대할 수 있으며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 바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프롤로그에서부터 그는 비참해 질대로 비참해진 한 창녀의 실화를 예로 들면서, 은혜 베푸는 유일한 기능을 상실해 버린 교회의 실추된 이미지를 적실히 꼬집어낸다. "교회요?! 거긴 뭐하러 가요? 안 그래도 충분히 비참한데, 가면 그 사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질 거에요!" 교회에 도움을 청해봤냐는 질문에 대한 창녀의 대답이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의 장소가 아니라, 거짓과 위선으로 양 날개를 삼아 거룩한 체하는 인간들로 채워져, 은혜가 아닌 도덕과 율법으로,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높은 곳에 서서 막대기를 휘둘러대는 집단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란 본질적으로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함에도, 교회에 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마치 도덕적이고 율법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오해되어졌다.

그는 또 강조한다. 불교의 고행, 힌두교의 업보, 유대교의 언약, 이슬람교의 법전은 모두 노력으로 인정받는 길을 제시하는 반면,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받는 것은 기독교뿐이라고 말이다.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소외된 자, 연약한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은혜다. 그들의 노오력이 아닌 것이다. 필립 얀시는 탕자의 비유에서 사랑에 애타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그 사랑의 은혜는 값없는 용서와도 같다고 한다. 용서는 주판알을 튕기는 어떤 계산이 필요한 산수가 결코 될 수 없으며, 오직 불가항력적으로 타오르는 사랑의 힘에 짐짓 무너져 내리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일 뿐인 것이다.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을 만큼, 그 은혜의 힘은 실로 막강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아닌 우리들이 실생활에서 하는 용서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필립 얀시는, 용서는 인간의 비본성적 행위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래서 그 어떤 행위보다도 어려우며 때론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도 있지만, 우리가 용서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의 수혜자이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나도 바로 그 은혜와 사랑의 수혜자인 것이다. 그래서 용서할 수 있고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한편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머리로 이해한 만큼 세상에 은혜 베푸는 일을 그다지 잘 해내고 있지 않다고도 분석한다. 역사적인 실례를 들며, 특히 신앙과 정치라는 영역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비틀거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결국 은혜에서는 사랑이 가장 핵심 되는 본질이라며, 사랑을 몰아낸다면 예수의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우리는 예수의 복음에서 사랑만을 뺀 채 사람들에게 '정제된 은혜'를 베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사랑이 빠진 '정제된 은혜'는 결국 율법주의와 도덕주의에 갇힐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게 되었고, 그 숙명은 곧 현재 교회의 이미지로 진화해 버린 것이다.

우린 예수가 행한 기적에 놀라워 한다. 그러나 필립 얀시는 예수가 행하신 용서와 은혜의 선물이 예수의 기적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이라고 말한다. 기적은 물리적 법칙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은혜의 용서는 도덕적 법칙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율법주의와 도덕주의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이 시대에 유일하게 그 법칙을 초월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은혜라는 점은 실로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놀랍게도 불완전하고 모자라고 연약하고 유한한 우리들이 이 땅을 나그네로 살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수 있으며, 오직 그 때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은혜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리고 그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복음이다.

암울했던 클리블랜드에서 은혜의 인디애나를 거쳐, 지금 난 여기 캘리포니아에 와 있다. 계획에도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던 인생이다. 하지만 나에겐 성공지향적 가치관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하나님나라 가치관으로 끊임없이 변화해가고 있는 소중한 언약의 여정이다. 나의 삶을 통한 이 작은 나눔의 목적은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는 메시지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나의 나눔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내가 거쳐온 삶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립 얀시가 책의 서두에서 말했듯, 나 역시 이러한 나눔이 은혜를 설명하는 것이기 보다 은혜를 전달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쓰여지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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