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정제된 아름다움을 만나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정제된 아름다움을 만나다
  • 김영웅
  • 승인 2018.12.12 2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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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2017년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2017년

때묻지 않고 홀로 빛나는 원석이 카프카라면, 손이 많이 가는 정제과정을 거쳐 마침내 간결함과 고유함의 옷을 입은 보석은 하루키다. 함부로 던져진 것 같은 무례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성실하고 고운 정성이 자리잡았다. 정갈하고도 완숙한 글을 만났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그를 만난 건 행운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갈한 책을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는 ‘죽음’이다. 죽음은 곧 상실, 이 책이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판되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죽음은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흠뻑 적시고 있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에서 주인공 와타나베와 직간접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놓인 소수의 등장인물 중 절반이 실제로 죽음을 맞이했다.

고등학생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의 자살은 이 책에 등장하는 첫 죽음이다. 이 죽음은 이 책을 구성하는 중심 이야기의 발단 역할을 하며, 이 책의 마지막 죽음인 나오코의 자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그 사이에 소개되는 죽음도 넷이나 된다. 먼저 과거에 있었던 나오코 언니의 자살, 역시 과거에 있었던 미도리 어머니의 병사, 그리고 와타나베가 직접 만나기도 했던 미도리 아버지의 병사, 마지막으로 와타나베의 학교 선배 나가사와의 애인이었던 하츠미의 자살이 그것이다. 죽음을 육체적 의미만이 아닌 정신적 상실의 관점에서 본다면, 와타나베의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특공대의 갑작스런 사라짐까지도 이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이 책은 하나하나의 의미있는 죽음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며 살아남은 자였다.

村上春樹, ノルウェイの森 (1987)
村上春樹, ノルウェイの森 (1987)

소개된 죽음의 절반 이상이 자살이라는 점은 나를 슬프게 했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원인을 불문하고 비극이다. 하루키 역시 기즈키나 나오코, 나오코의 언니, 그리고 하츠미의 자살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와타나베라는 남자 주인공의 눈으로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일상의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자살을 포함한 죽음, 죽음을 포함한 상실은 우리 삶의 끝이 아닌 삶의 현재에서 버젓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린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겠지만, 역시 죽음과 함께 현재 숨쉬고 있는 존재다. 죽음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있으며, 또 우리 바로 곁에 있다. 상실의 아픔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Loss is all around.

상실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상실은 어느덧 높아졌던 인간의 자의식을 낮아지게 만드는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진다. 또한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를 직시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겸허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특급 도우미이기도 하다. 우린 상실로 인하여 같아진다. 상실은 인간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도구로 역할한다.

비록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죽음으로 커다란 상실을 경험했지만, 하루키는 그에게서 자살의 기미조차 전혀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는 오히려 자살을 스스로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 (기즈키, 나오코, 하츠미)에게 힘이 되었던 존재였으며, 곧 암으로 죽을 상황에 처했던 사람 (미도리의 아버지)에게까지도 편하고 뭔가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죽음의 이미지가 아닌 삶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하루키는 와타나베의 이미지를 죽음이 아닌 삶으로 부여함으로써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묵묵히 삶을 살아내는, 일종의 희망을 보여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와타나베의 몸과 마음을 몇 년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나오코의 죽음은 어찌보면 그에게 부여된 상실의 시대를 지나 꿋꿋하게 생생한 일상을 살아내가는 미도리와의 관계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The Beatles. Norwegian Wood(1965)
The Beatles. Norwegian Wood(1965)

죽음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버젓이 존재하듯이 삶 또한 그렇다. 죽음과 삶은 시작과 끝이 아닌, 공존하며 다른 두 개의 존재일 뿐이다. 우리의 삶은 죽음과 삶의 복잡한 혼합물일지도 모르겠다.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그런 존재였다. 나오코가 죽음이었다면 미도리는 삶이었다. 둘은 함께 존재했으며 서로를 알았다. 그 둘 사이에 있던 와타나베는 먼저 간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옆에 와있던 삶에 안착한 것이었다. 그렇다. 이 책은 나오코로 시작하여 미도리로 끝을 맺는다. 상실의 시대에서도 삶은 끈질기게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하지만 지나가버리는 죽음을 먼저 보내고 우리를 살아남게 해주는 것이다. Life is all around.

책을 다 읽고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찾아 들었다. 정제된 글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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