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고통의 정서적 문제에 대한 답
공감: 고통의 정서적 문제에 대한 답
  • 김영웅
  • 승인 2018.11.14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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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 ‘헤아려 본 슬픔’, 홍성사, 2004
C. S. 루이스, ‘헤아려 본 슬픔’, 홍성사, 2004
C. S. 루이스, ‘헤아려 본 슬픔’, 홍성사, 2004

어쩌면 우린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철이 들고 어른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은 고통스럽고, 고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빙빙 도는 원과도 같다. 그러나 에 갇히지 않고 나를 넘어 남에게로 향하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슬픔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공감하지 못한다면, 나의 고통과 슬픔은 내 안의 나를 더욱 키울 뿐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고통과 슬픔은 우리가 늘 두려워했던 것, 자멸의 무기가 될 수 있다.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는 과정이 우리네 인생이라면, 타인을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은 목적일 것이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을 살아내는 어른들의 진정한 어른스러움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과 소통능력, 그리고 이를 위한 고통과 슬픔에 대한 이해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C. S. 루이스가 이 책 헤아려 본 슬픔의 초반부에 토로하는 고백이다. “슬픔이 마치 두려움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무섭지는 않으나, 그 감정은 무서울 때와 흡사하다. 똑같이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이 벌어진다. 나는 연신 침을 삼킨다. 어떤 때는 은근히 취하거나 뇌진탕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상과 나 사이에는 뭔가 보이지 않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다른 사람이 뭐라 말하든 받아들이기 힘들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게다. 만사가 너무 재미없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집이 텅 빌 때가 무섭다. 사람들이 있어 주되 저희끼리만 이야기하고 나는 가만 내버려 두면 좋겠다……. 슬픔은 게으른 것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질문한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 놀라웠다. 알다시피 그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을 썼던 바로 그 사람이다. 동일 인물이란 말이다. 그는 고통의 문제를 출판한 이후 뒤늦게 결혼을 했고 몇 년 만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이 책 헤아려 본 슬픔이 탄생한 배경이다. 자칫하면 고통의 문제에서와는 상반된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 책에서는 그의 솔직담백한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의심의 고백들이 수두룩하다.

고통의 문제가 남겨놓은 여백이 마침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오히려 루이스가 더 와닿았고, ‘고통의 문제가 남겨놓은 여백이 마침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통의 문제가 고통이 일으키는 지적인 문제에 대한 루이스의 답변이라면, 이 책 헤아려 본 슬픔은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그의 답이라 할 수 있다.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에서 확신의 옷을 입고 탁월한 논리의 기독교 변증을 선보였다면, ‘헤아려 본 슬픔에서는 그의 확신은 사라지고, 대신 정서적으로 풍부한 솔직함과 진솔한 고백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루이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피터 엔즈는 옳았다. ‘확신의 죄에서 그가 말한 것처럼, 의심을 손님으로 맞아들인 이후 두려움과 원망과 슬픔의 단계를 넘어서서 벼려진 칼처럼 루이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답변은 이 책에서 더욱 풍성해졌다. 저기 높이 있던 루이스가 낮은 데 머무는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암 환자였던 아내와 결혼한 루이스였지만, 치료 과정과 병행한 그의 사랑은 아내의 완치를 바랐을 것이다. 도중에 호전되는 것 같은 검사 결과에 희망으로 가득 찰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예정된 죽음을 맞이했고, 루이스는 그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어서 상실의 고통과 슬픔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일까. 책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비록 다 이해할 순 없을지라도, 그 커다란 상실로 인해 그가 빠져버린 슬픔과 고통의 늪이 날카로운 논리로 단련되었던 그를 얼마큼 옥죄었을지 상상해보면, 내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책은 루이스가 아내를 잃고 나서 힘들어하던 기간에 끄적거린 노트를 몇 권 합친 작품이다. 책을 쓰려고 작정하지 않고 출판된 책이어서 그런지 거의 정돈되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진 생각의 파편들을 읽어볼 수가 있었고, 어쨌거나 맞닥뜨린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용솟음치는 그의 내면의 격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정서적인 충격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루이스는 자신을 찾아온 의심을 환대한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동안 갈고 닦은 논리의 힘으로 이렇게 저렇게 싸워도 본다. 하나님의 존재를 묻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한다. 하나님이 수의사인지 아니면 그저 인간에게 고통과 슬픔을 줌으로써 생체실험을 하고 있는지를 묻기까지 한다.

이미 그는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은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죄의 결과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치료하시는 과정 중 발생하는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으로써 고통이 혹독한 도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고통은 반역한 인간에게 개심할 유일한 기회를 제공해주는 역할도 합니다라고도 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런 사실을 뒤집지는 않는다. 그는 결국 하나님을 수의사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어쨌거나 진실로 고통스럽고 슬펐다.

어쩌면 고통의 문제가 답하지 못한, 고통과 슬픔이 일으키는 정서적인 문제에 대한 답변은 공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무리 지적인 답변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도, 아주 개운하지 않은 기분에 무언가 더 있을지도 모를 답을 찾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할까? 정서적인 문제에 지적인 답변이란 게 애당초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고 내가 내린 작은 결론의 키워드는 공감이다.

이 책을 읽고 난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루이스가 이 책에서 고통의 문제에서 말하지 않은, 더 명징한 논리의 답을 선사하는 것도 아니지만, 나에게 있어선 더 선명하게 이해가 되었던 이유는 아마도 논리를 갖춘 지적인 차원의 답 때문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논리에 날이 선 그도 슬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사랑을 곱씹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 의심을 하면서 고군분투를 해나가는 모습이 여과 없이 노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 루이스가 그가 직접 설파한 논리를 완벽히 몸소 공감하는 모습 자체가 내게 일종의 답이 되었다. 참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질문하고 답을 원하는 것들이, 그리고 우리가 이해한다고 하는 것들이 어떤 합리적인 논리의 답을 넘어서 공감받는 행위 자체에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슬픔과 고통을 분석하는 차원을 넘어 그것들을 직접 체험하고 헤아려 보며 얻게 되는 지혜의 산물. 이 책을 읽고 난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고통과 슬픔으로 내 안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남을 향해 쭉쭉 뻗어 나갈 수만 있다면, 서로 위로받고 공감받으며 사랑을 만들어갈 수만 있다면, 슬픔과 고통의 답은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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