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먹고, 화평을 누리고 미래는 잊어버리는 것
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먹고, 화평을 누리고 미래는 잊어버리는 것
  • 온상원
  • 승인 2018.11.13 22:0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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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브루그만,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 대한기독교서회, 2016
월터브루그만,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 대한기독교서회, 2016
월터브루그만,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 대한기독교서회, 2016

예배는 무엇일까? 혼자만의 독백의 시간을 예배라고 할 수 있을까? 예배는 대화의 시간이다. 즉 상대방이 있고, 상대방과 관계성 속에서 예배가 있다. 즉 대화의 상호작용(a Dialogic interaction)이 있는 것이 예배이다. 결국 내 앞에 상대방이 없다면 그것을 예배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는 개인 혼자 드리는 예배였는가? 그것은 야훼 앞에서 개인 혼자가 아닌 공동체 전체의 언약의 몸짓과 말이었다. 공동체는 계약적 관계가 아닌 언약 관계 안에서 속죄일, 희년, 부림절 축제를 기념하고, 속죄와 선물, 그리고 교제의 의미인 희생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 언약의 몸짓을 했다. 그것이 공동체적 예배다.

하늘에 계신 야훼께서는 고대 이스라엘에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또한 반대로 이스라엘은 야훼께 어떤 말을 하였을까? 야훼는 이스라엘 나라에 제사장을 통해 주고받는 전례적인 말로 의사를 전달하며 관계성을 증진했다. 그분은 우리에게 거룩한 뜻을 선포하시고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보증하셨다.

이런 하늘에 계신 야훼의 깊은 마음속에서 이스라엘은 가만히 침묵하지 않는다. 그들의 미래는 야훼께 달려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야훼와의 언어를 통한 상호 작용에 참여했다 야훼의 말씀과 행동에 응답함으로써 야훼와의 대화를 주도했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축복을 회상하고, 이 세계를 건설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진실을 말했다. 특히 진실 말하기(truth-telling)는 어떤 순서가 있는 듯, 저자는 하나님께 진실을 말하는 6단계를 언급한다.

물론 저자는 6단계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정리해 본 것이다. 1) 자신의 과실과 실패를 과감히 고백해라. (51:3~5) 2) 자신 안의 무력감 감정을 표출해라. (1:2, 3:52~54) 3) 부당하고 참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라(3:7, 5:5~6, 10:15~16), 4) 위의 3가지 고백 뒤에 다시 하나님 언약에 대한 확신으로 청원(petition)하라. 5) 청원함으로 인해 감사가 나온다. 6) 그 감사함은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몸짓으로 나타난다. 즉 공동체가 함께 먹고 마신다.

이러한 야훼를 향한 진정한 말과 행동으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진정한 예배로 승화된 듯싶다. 그러면서 마지막 5장에서 저자는 흥미롭게도 예배를 틈새(play)라고 정의한다. 틈새란 무엇인가? 저자는 이렇게 정의한다. “Play는 놀이나 오락, 유흥의 개념이 아니라 대신 우리가 톱니바퀴 사이의 헐거운 틈새, 각 양쪽의 톱니바퀴 사이의 틈새. 그 틈새가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톱니바퀴 사이에 틈새가 없으면 예배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먹고, 화평을 누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잊어버리는 것

그러므로 예배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확실한 관습으로서, 어떤 과정에 있음을 말한다. 더 나아가 예배는 예배 안에서 서로 틈새를 보이는상호 작용과 특성들을 허용하면서 어느 정도는 정착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야 한다면서 7가지의 틈새를 말한다. 즉 예배는, 복종과 자유 사이에 있고, 거룩함과 정의로움, 국가 제의의 가족과 씨족 예배 사이, 즉 공공성과 개인의 예배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또 예배는 토라와 왕 사이에서의 틈새로 토라 즉 인과응보와 왕의 선물 사이에 있음을, 찬양과 탄원의 사이에, 마지막으로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희망사이에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의 예배는 고정된 틀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그 격식을 준행해야 하는 것으로 고착된 느낌이 있다. 고착된 것이 아닌 그리고 톱니바퀴 사이의 헐거운 틈새에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다른 이질적 성격의 톱니바퀴 속에서 균형 잡힌 예배자로 서가야 하리라. 또한 그것이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바베트의 만찬을 언급하며 시인답게 시편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사랑과 진실이 거리에서 만나고 정의로운 삶과 온전한 삶이 얼싸안고 입 맞추네. 진실이 땅에서 파릇파릇 싹트고, 정의가 하늘에서 쏟아지네. 그렇다. 하나님께서 선함과 아름다움을 내리시니 우리 땅이 넉넉함과 축복으로 응답하네.” (시편 8510~12절 메시지 성경/유진 피터슨)

저자는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먹고, 화평을 누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그것이 예배라고. 바베트의 어리석은(?) 행동. 가진 모든 것을 다 타인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자유 하는 모습.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다른 한쪽에서의 다른 마음이 나를 잡고 있다. “난 그냥 살아야겠다. 어찌 바베트는 다 타인에게 내놓았는가?” 난 그저 행동이 아닌 마음으로만 바베트를 바라본다. 그러나 언젠가 바베트의 마음을 수용하고 이 땅 너머 다른 소망을 볼 수 있을까? 자꾸 바베트의 마지막 발언이 맴돈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아요~"

 

글쓴이 온상원은, 서향교회 성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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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신 2018-11-22 07:03:47
진실 말하기!
오늘 날 교회가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아주 귀한 예배 순서 인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전현철 2018-11-14 16:30:28
최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