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아 안디옥의 베드로 동굴교회를 떠나 바울의 고향 길리기아(Cilicia) 다소로 이동했다. 자동차로 3시간이 걸렸다. 빗길이었지만 길이 참 잘 닦여 있었다. 고대에 어느 길, 어떤 이동 수단을 사용하였는지 모르지만, 이 길은 안디옥교회에서 바울을 데려오기 위해 바나바가 심부름으로 다녀갔던 길이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행 11:25-26)
안디옥교회는 바울의 합류로 인해 큰 부흥을 이루었다. 바울 자신이 최초의 선교사가 되어 위대한 기독교발전에 기여한 인물이 되었다.
오늘날의 다소는 작은 도시로 초라하다. 그러나 그 옛날 바울이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다”(행 21:39)이라고 소개하는 것만 봐도 당시 로마의 자부심을 가질만한 도시였음은 틀림없다. 절세의 미인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BC 69~30)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BC 82~30)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이곳 다소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다소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으로 최고의 도시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번성했던 다소는 이제 작은 마을로 전락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의 고향임에도 그 명성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 세력이 이 지역에 자리 잡기 전까지만 해도 다소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의 이름이 ‘바울의 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슬림은 이 문을 ‘클레오파트라의 문’으로 바꾸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다소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감격을 느낀다. 다소의 대로에는 클레오파트라의 문이 방문자를 맞이한다. 바울도 수 없이 이 문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바울이 회심한 이후에도 한동안 고향 다소에서 지냈다는 것은 안디옥의 바나바가 바울을 찾으러 다소로 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소에는 바울의 생가와 생가 한편에 바울의 우물이 있다. 생가의 유적은 지하 유리 바닥으로 보호되어 있고, 바울이 어린 시절 마셨을 40여 미터의 바울의 우물에서는 아직도 우물물이 솟아나고 있다. 위대한 선교사 바울을 기념한 바울 기념교회가 바울의 존재를 간직하고 있다.
바울의 우물 인근에는 로마시대 대로의 일부가 드러나 있다. 바닥 포장의 돌 두께가 두툼하니 40㎝는 족히 된다. 도로 양옆으로는 하수구가 지나고 있다. 도로로 향한 관의 하수구는 정교하다. 바울 당시에 정말 잘 정비된 로마식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다소로 들어가고 나오면서 그 주변 지역이 정말 광활한 평원임을 알 수 있다. 다소의 이름에도 평평한 바구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이 도시의 부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풍요한 농업이었다. 도심 중심에는 타르수스 산맥에서 흘러 지중해로 흘러가는 124킬로미터 길이의 타르수스 강(Cydnus river 또는 Berdan River로 부른다., 터키어로는 Tarsus Cayi)이 흐른다. 이 개울 같은 강에서 바울이 멱을 감고 물놀이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