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 이도환
  • 승인 2017.11.14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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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21세기북스, 2017
박흥식,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21세기북스, 2017
박흥식,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21세기북스, 2017

이런 긴 글은 결코 좋은 소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종교개혁을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좋은 책이 있어 저의 배움을 함께 나눕니다.

지난 주 금요일(10일) 남쪽제자목자회 독서모임에서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박흥식 교수 저자 특강을 들었다. 신학자가 아닌 일반 역사학자(박흥식 교수: 서울대 서양사학과)의 책이라 좀 더 자료에 충실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 기대는 넉넉하게 충족이 된 듯하다. 신학의 시각은 어떤 지점에서 사실 관계를 넘어서는 은혜로운 해석의 위험성이 늘 있기 마련이어서, 좀 더 사실관계에 입각한 종교개혁에 관한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늘 있었다.

저자의 의도는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라는 책의 이름 안에 그대로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미완의 개혁가저자는 루터를 이렇게 부른다. 한국 개신교가 사실에 기반해서 루터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루터의 우상화가 아닌가 할 정도로 루터를 칭송하기만 하는 태도를 오랫동안 감지했기 때문이다. 기실 그렇다. 실제 개신교의 아버지 같은 분이 루터인지라,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과장과 확대해석은 설교자 강단에서, 신학에서 적지 않게 이루어졌고, 그 위에서 매년 종교개혁주일이 지켜졌고, 루터는 칭송이 되었다. 그래서, 어쩌면 다시 개혁을 개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개혁자에 대한 허상과 신화화에서 종교개혁의 원래 의미가 퇴색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개혁으로 이어지지 않게 된다. 개혁이 아니라, 기념식이 될 뿐이다. 진정한 개혁은 자체검열에서 시작이 된다. 개혁을 개혁해야 오늘날의 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종교개혁의 의미가 새로워 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루터의 신화화 벗기기라는 부제를 붙일 수도 있겠다. 실제 루터의 공헌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많다. 그러나, 루터이외에 종교개혁의 공헌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고, 루터의 허물도 그 크기가 상상외로 적지 않다. 어떤 운동도 시대의 산물이어서 21세기의 시각으로 모두 제단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루터의 공헌만 퉁치고 지나가기에는 종교개혁의 스팩트럼이 너무 넓고, 너무 들여다 볼 게 많고, 극복해야 될 것도 많다. 이 짧은 지면에 몇 가지만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이 책을 열자말자 다가오는 첫번째 충격은 실제로 루터는 15171031일에 비텐베르크 성 교회문 입구에 면벌부(면죄부)를 비판하는 논제 95개를 붙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일 날 루터는 이 논제를 마인츠 대주교 에게 보내어 면벌부 문제에 대한 개선은 요구했지만, 성교회 문에 붙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517년부터 루터는 개신교를 꿈꿨던 것이 아니었고, 단지 그가 원했던 것은 면벌부 문제의 개선이었지, 논제의 논쟁화나 확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 루터가 붙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고, 논제의 확산을 원치 않는 루터의 언급만 여러 군데서 나올 뿐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배워온 대로 비장한 얼굴로 성 교회의 문에 논지를 붙이는 루터의 얼굴을 상상한 우리를 머쓱하게 한다. 꼭 이런 신화화가 필요했는가 싶다. 과장과 신화화는 그렇게 개신교의 역사가 되어 지금도 면면히 흐른다. 모든 대형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과연 대형교회가 되는 과정에서 이 과장과 신화화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이것이 있어야 뭔가 먹힌다는 논리는 어쩌면 개신교 시작의 뿌리에서부터 작동했는지 모른다. 95개의 논제를 마인쯔 주교에게 보내고, 카톨릭으로 부터 파문을 앞두고 1520년부터 종교개혁에 대해 비로소 쓰기 시작한 루터의 글들만으로도 루터의 공헌은 충분한 것이라고 본다.

또 한 가지 종교개혁 500주년에 즈음하여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은 종교개혁에서 평신도 운동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미 불가타 성경이 1460년경에 독일어로 번역이 되어서 평민들, 수공업자들이 독일어로 성경을 읽고 있었다는 것은, 독일어로 쓰여진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한 글이 급속도로 대중화가 될 수 있었던 엄청난 배경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문맹률이 높았던 그 시대를 감안해서 종교개혁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평민작가들, 인쇄업자들은 당시 대중의 수준을 고려한 전단지나 소책자를 제작하였고, 무명의 화가들은 전단지나 소책자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종교개혁의 내용을 퍼뜨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종교개혁 확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이다. 다시 이야기 하면 종교개혁의 확산에는 그 시대 개혁신학자들 뿐만 아니라, 평신도 수준에서의 창의적 소통의 방식과 대중을 고려한 커뮤니케이션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것을 평신도 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루터, 깔뱅, 쯔빙글리다 좋지만, 그 시대 이름 없는 평민 작가들, 무명의 화가들, 인쇄업자들도 종교개혁의 한 축으로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시대에도 진정한 개혁의 방점은 목회자에게 일방적으로 매이지 않는 성숙한 평신도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농민운동과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는 반드시 지적해야 할 부분이다. 본인이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루터는 과격한 농민운동에 과한 혐오를 드러낸다. 루터가 꿈꾼 개혁은 교황의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연방군주를 배경으로 하는 종교개혁이었기에 이에 걸림이 되는 농민운동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인권의식으로 보자면 약자에 대한 배려, 평등의식은 없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도 마찬가지이다. 그때 당시 독일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은 사회적 약자였지만,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저 루터에게 사라져야 할 대상이었고, 안타깝게도 루터의 이런 논리는 후대 히틀러의 반 유대인 운동에 일조를 한다. 혐오와 차별을 이야기 하는 이 시대의 기독교의 단면과 묘하게 겹친다.

무엇에 저항해야 하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구분은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적어도 예수가 보여준 포용과 함께 함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 아름다운 복음도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요란하게 지나갔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글쓴이 이도환 목사는, 미국 LA에서 미국장로교단 PCUSA 소속의 '독립장로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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