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우리의 친구/이웃
룻, 우리의 친구/이웃
  • 이택환
  • 승인 2018.11.12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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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룻기 1:1-18
‘Ruth Gleaning’, James Tissot 1896
‘Ruth Gleaning’, James Tissot 1896

성경 66권 중 제목이 여성 주인공 이름으로 된 책이 두 권 있습니다. 에스더와 룻기지요. 그중에서 룻기가 오늘 말씀인데, 룻기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이 고난을 극복하고, 나중에 이스라엘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감동적인 해피엔딩 스토리입니다. 룻기는 지금 읽어도 완벽한 짜임새를 갖춘 단편소설로 손색이 없어요. 룻기를 일종의 소설 장르로 보는 이유는 주인공 룻을 비롯해서, 오르바, 말론, 기룐과 같은 등장인물의 특이한 이름 때문이기도 합니다.

먼저 룻은 히브리어로 친구/이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원수이기도 한 이방 모압 여인이기 때문에, 원래는 유대인의 친구/이웃이 아니지요. 그런데 룻기를 읽고 나면 룻은 더 이방의 원수가 아닌, 친구와 이웃, 더 나아가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 인물로 자리하게 됩니다. 한편 룻의 동서인 같은 모압 여인 오르바는 그 이름에 목이 곧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실은 오르바도 착한 여인인데, 시어머니 나오미가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때 함께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집이 센 여자로 오해받는 면이 있습니다.

더 특이한 것은 룻과 오르바의 남편 말론과 기룐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말론은 그 뜻이 병골이고, 기룐은 약골입니다. 이처럼 이름이 지닌 상징성으로 볼 때, 이 이야기가 100% 사실이라기보다 많은 부분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유대인들은 룻기를 역사와 관련된 예언서(느비임)로 분류하지 않고(그랬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처럼 사사기-룻기-사무엘 순으로 이어졌을 텐데), 그들의 성경에는 시편,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와 같은 성문서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룻기가 100% 허구라는 것은 아닙니다.

룻기는 유대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오순절(칠칠절/맥추절) 때 읽혔습니다. 룻기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보리 수확 철에 룻이 보리 이삭을 줍는 장면이지요. 한편 오순절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모세율법을 받은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엄밀히 말해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후손만으로 구성된 단일혈통이 아니라, 그들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떠돌이 계층인 '하비루'들이 시내산에서 율법 수여를 통해 형성된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을 받은 오순절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 여인 룻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유대 문헌에서 룻은 이방인 개종자의 모델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사사 시대가 그 배경입니다(1). 당시 이스라엘에 큰 흉년이 들자, 유다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 기룐을 데리고 이방 모압 땅으로 떠납니다. 베들레헴이 원래 떡집이라는 의미인데, 정작 떡집에 먹을 것이 없는 대재앙이 온 것입니다. 사사 시대에 대한 성경 역사서술은 단순합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외적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고통 중에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고 준비된 사사를 보내, 이스라엘을 외적으로부터 구원해주십니다. 그리고 또다시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요.

전형적인 신명기 역사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벌을 받습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도 같은 징계의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약 10여 년 뒤 이스라엘이 회개했는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다시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룻기를 읽을 때마다 논란이 되는 이슈가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든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스라엘의 범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엘리멜렉 가족이 왜 그렇게 폭삭 망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떠날 때는 풍족한 상태였는데, 돌아올 때는 완전히 빈손이었습니다(21). 아니 빈손 정도가 아닙니다.

모압으로 이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그 후에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압 여인 룻, 오르바와 각각 결혼했는데, 이들 형제 역시 얼마 후 사망하게 됩니다. 결국 남은 사람은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와 그녀의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세 여인뿐입니다. 따라서 엘리멜렉의 가족 중 남자는 아무도 없고, 남겨진 재산 하나 없는 무일푼 상태로 세 과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과부는 고아와 같은 처지였음을 고려할 때, 과연 이 기구한 운명의 세 여인에게 미래가 있을까요? 게다가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국적도 다릅니다.

이삭 줍기(1857), Jean-Francois Millet
이삭 줍기(1857), Jean-Francois Millet

많은 사람이 이들이 폭삭 망한 이유를, 엘리멜렉 가족이 애초에 이스라엘을 떠난 데서 쉽게 찾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비록 흉년으로 살기가 어려워도 거룩한 땅 이스라엘에 남아있어야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땅으로 이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엘리멜렉은 그 이름이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는 뜻인데, 그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산 결과,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굶어 죽을지언정 이스라엘을 결코 떠나면 안 되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흉년 때 먹고살기 위해 이스라엘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간 경력이 있지요. 물론 나오미가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13),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20) 고 고백한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하나님 앞에 토로한 것이지, 그것이 그들의 죄를 탓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명확히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또한 이들이 당한 고난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함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룻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엘리멜렉과 말론 기룐을 포함하여 특별히 악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오미와 룻을 보면 모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한결같이 신실한 선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식의 낙인찍기가 남아 있습니다. 가령 목사 부인이 일하면, 아무리 가난해도 목사 가정이 하나님만 의지해야지 어떻게 세상으로 나갈 생각을 하느냐,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목사 아내가 아니라, 목사 자신이 2중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교단 총회뿐 아니라 개교회 안에서도 같은 이유로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교수, 의사, 변호사, 작가로서 많은 수입을 얻는 2중직 목사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제가 없습니다. 그저 대리운전, 편의점 아르바이트, 막노동하는 목사들에게만 목사가 믿음이 없이 세상일 한다고 손가락질합니다.

마침 이스라엘에 풍년이 들어 먹을 것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 합니다. 그러자 두 며느리도 함께 따라나섭니다. 정상적인 상황, 즉 남편이 살아있다면 그게 맞습니다. 그러나 룻과 오르바는 모두 남편이 죽고 없어요. 게다가 남편과 사이에 낳은 자식도 없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를 따라, 그것도 국적이 다른 시어머니를 따라, 그녀의 나라에 함께 가겠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상황입니다. 이유는 딱 하나, 시어머니 나오미의 인격이 훌륭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나오미가 죄가 커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 남편과 두 아들이 죽었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과연 나오미는 따라오는 며느리들에게, “그래, 생각 잘했다, 너희가 당연히 함께 가야지!”하지 않습니다. 두 며느리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고, 그들이 자신의 가족에게 돌아갈 것을 권합니다. 며느리들 또한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휙 돌아서 떠난 게 아니라, 오히려 가지 않겠다고 소리 높여 웁니다. “어서 가라, 못갑니다오랜 실랑이 끝에 오르바가 소리 높여 울면서, 나오미에게 입 맞추고 친정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오르바는 끝내 시어머니를 배신한 나쁜 여자일까요?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오르바는 며느리로서 자기가 할 일을 충분히 다 했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룻기는 이런 순간이 왔을 때, 모든 그리스도인 며느리에게 오르바가 아닌 룻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룻기에 나오는 일을 문자적으로 따라야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룻기의 근간이 되는 수혼제도 지켜야 합니다! 결혼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고대 중동의 풍습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내 태에 장차 너희의 남편이 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니 어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수혼제가 아니라, 그 정신입니다. , 중요한 것은 당시 과부와 같은 오늘날의 사회적 약자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지요. 수혼제를 지키려고 하다가는 자칫 성범죄자가 될 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룻과 같은 약 250만 명의 이주민 디아스포라가 있다.

그럼에도 룻은 끝내 시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나오미에게 매달립니다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은 단지 시어머니를 따라갔던 것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시어머니의 신앙을 따라 여호와 신앙을 갖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룻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오미뿐 아니라, 뒤에 나오는 보아스를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이 이방 여인 룻에게 베푼, 공의와 친절과 긍휼과 사랑입니다(하나님의 헤세드!). 그래서 룻기의 분위기는 놀라울 정도로 이방인 낯선 자들에게 친근하고 포용적입니다. 그 이야기가 단지 그 시대에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고, 다윗의 족보로 이어져 마침내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으로 우리에게 연결되었습니다.

김동문
ⓒ김동문

현재 우리나라에는 오늘 말씀의 룻과 같은 약 250만 명의 이주민 디아스포라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인은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 특별히 자민족 우월주의가 강합니다. 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국내 다문화 이주민들에게 나타나는 높은 우울증과 자살률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국내 이주민 디아스포라는 국내 장기체류 및 귀화하는 외국인 증가와 함께 더욱 늘어날 전망인데요, 그분들이 언젠가 우리 교회를 찾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룻을 친구와 이웃으로 맞이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들을 친구와 이웃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직분도 함께 나누고 운영위원으로도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일을 잘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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