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전쟁하듯이 폭력에 저항하라
[김동환] 전쟁하듯이 폭력에 저항하라
  • 김동환
  • 승인 2018.11.1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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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목사의 설교 - 여호수아 7:10-15
Joshuah Ordering the Sun to Stand Still (1743-1744), Joseph Marie Vien in Musée Fabre, Montpellier.
Joshuah Ordering the Sun to Stand Still (1743-1744), Joseph Marie Vien in Musée Fabre, Montpellier.

1.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보아요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벌써 11월 둘째 주 주일입니다. 학교도 이제 조금 적응하는 것 같아요. 이번 주에는 학교폭력에 관한 수업을 했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학교에서, 혹은 학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마음이 상한 적이 있나요? 친구들의 어떤 말, 어떤 행동이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나요? 떠오르는 게 있는 친구 한번 이야기해보아요. , 나를 힘들게 한 친구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고, 어떤 말과 행동이 나를 마음 아프게 했는지를 이야기해보는 거예요!”

그러자 아이들이 아주 많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무슨 인생을 그렇게 오래 살았는지, 상처받은 이야기들이 아주 많더라고요, 1학년 때 일까지 이야기하더라고요. 어떤 반은 잘 진행이 되었는데, 어떤 반은 수업이 망했습니다. 자꾸 누가 이런 말 했어요, “누가 누구를 때렸어요.” 이렇게 고자질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이에요. 그래서 서로 내가 언제 그랬냐, 언제 그랬다이러면서 말다툼이 생겼습니다. 결국 우는 친구도 생겼고요. 저는 아직 멀었구나하는 생각을 했구요. 수업은 역시 어렵다는 걸 느꼈습니다.

학교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폭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또 그 폭력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친구들의 마음에 공감해보는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러분은 살면서 언제 폭력을 경험하거나, 보게 되나요? 어떠한 상황을 보면서 폭력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는지, 혹은 여러분 자신에게 이건 좀 폭력적이다, 라고 느껴졌던 경험이 있다면, 오늘 예배 후에 나눔 해주시면 좋겠어요.

초등학교 수업시간에도 이야기하는 거지만, 물리적 폭력만 폭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여러분도) 아시겠죠? 아이들에게 때리는 것뿐만 아니라, 말이나 문자로 하는 것도 학교폭력이라는 이야기를 해요. 정신적인 폭력이 정말 무서운 거죠.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인류가 발전하면서 폭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해요. 대부분 물리적인 폭력, 즉 전쟁과 살인과 같은 범죄 비율이 줄어드는 데이터로 말하는 거예요.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도 말해요. 물리적인 폭력은 줄어들고 있지만, 정신적인 폭력은 늘어나고 있다! 단순히 전쟁이 줄어든다고 이 세계에 폭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학교폭력을 예로 들면 이런 거죠. 예전에는 그냥 돈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몇 대 때리는 정도라면, 이제는 왕따의 수준이 좀 높아진 거 같아요. 왕따 당하는 친구가 다른 친구를 못 사귀게 막는다거나, 카카오톡 대화방에 초대해서 욕을 한다거나, SNS 등을 이용해서 학교가 마친 후에도 계속된 정신적 폭력을 가할 수 있게 되었지요. 학교 안에서의 폭력 문제가 더 심해져서 결국 학교 커리큘럼 안에도 학교폭력 예방 과목이 들어가게 된 거 같아요.

우리 사회를 너무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겠지요. 저는 우리 사회에 폭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폭력이 무엇인지를 한 번씩 생각해보고, 또 예상치 못한 폭력으로 아파하는 이웃이 누구일지를 돌아보는 것이죠. 세상에서 가장 그런 일에 앞서 나가며 움직여야 할 사람이 저는 기독교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그럴까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폭력을 그대로 받으셨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물리적인 폭력, 정신적인 폭력 모두 받으셨습니다. 채찍질과 가시면류관, 십자가형을 받으셨고요, 사람들에게 무수한 모욕을 받으셨지요. 이단자로 몰리셨지요. 저주를 받았습니다.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세상에 외면당하셨어요.

그 모든 폭력을 거부하고, 세상에 무서운 심판을 내릴 수 있는 분이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폭력을 그대로 받으시되, 우리에게 돌려준 것은 구원이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칼을 들지 말라고 하셨어요. 칼로 평화를 이루려는 열심당 원들과는 다른 길을 걸으셨지요.

십자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폭력이 무엇인지를 고발하는 공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그런 폭력적인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공간입니다. 역설적인 신비의 공간이지요. 우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래서 폭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누군가 부당한 폭력을 받고 있다면 함께 아파하고 도와주고 싶게 되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말이죠.

 

Nicolas Poussin (1594~1665)
Nicolas Poussin (1594~1665), "Joshua's Victory over the Amalekites"

2. 구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이렇게 말하면 저절로 들려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폭력적인 분 아닌가요? 하나님도 정의를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시잖아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 그들을 몰살하도록 하시잖아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탈출할 때 여러 재앙으로 많은 사람이 죽잖아요? 어른, 아이, 동물들도 죽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 아닌가요? 또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나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때마다 많은 백성이 심판을 받고 죽지 않나요? 그런데도 기독교를 폭력에 저항하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나요?”

, 세상이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여러분은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대답이 쉽지는 않을 거예요. 구약을 읽는 법을 배우지 않은 분은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구약에 하나님이 무섭게 심판하는 장면을 인용하며 힘을 휘두를 때는 늘 교회가 권력의 중심에 있었을 때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대표적이죠. 십자가를 새긴 칼과 방패를 가지고 가는 거예요. 무슬림 적들을 쳐부수기 위해 말이죠.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은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적들을 물리치는 구약의 전쟁 기사들만 보이는 거예요. 교회의 부끄러운 역사이자, 인류의 아픈 기억입니다. 인간의 폭력적 성향과 왜곡된 종교적 해석이 합쳐지면 가장 무서운 결과가 나타나는 거예요.

폭력을 휘두를 몽둥이가 필요할 때, 힘이 있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정당성을 요구합니다. 그때 구약을 저렇게 마구잡이로 해석하게 되는 거지요. 하나님은 정의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신다, 그리고 그 정의심판의 대리자가 바로 나다, 이렇게 나가는 게 최악의 해석입니다. 교회는 구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아주 오랫동안 깊은 토론을 해왔어요. 그래서 교회가 구약을 읽는 법이 있는데, 오늘 읽은 본문 해석을 하기 위해, 그리고 구약의 전쟁 이야기를 해석하기 위해, 몇 가지 알아두셔야 할 내용을 짚어보겠습니다.

1. 구약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의 신앙고백 문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은 3000년 전, 신약은 2000년 전쯤의 신앙고백 문이에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꼭 그들에게 필요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정리된 이야기가 구약성경이지요. 특히 구약은 자음 문자로만 기록되었어요. 원래 히브리어에 모음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해석이 불분명한 구절도 많았는데, 유대인들이 해석을 돕기위해 자음을 붙인 건 1200년 전쯤이에요. 그래서 유대인들조차도 성경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리고 한글로 번역되어서 우리는 눈치 채기 어렵지만, 특히 구약은 형식이 가장 많아요. 히브리어로 읽으면 운문형식이 대부분이라는 말이에요. 우리나라 말로 역사서라고 분류하지만, 그건 외국인들이 성경을 분류할 때 하는 방식이고, 유대인들은 구약은 토라, 크투빔, 느비힘, 이렇게 세 장르로 분류하지요. 모세오경, 예언서, 성문서라는 뜻이고요, 오늘은 하나하나 설명하긴 어렵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 오늘날 역사라는 현대적 개념의 장르가 성경에 있지는 않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중요한 건, 구약은 일차적으로 고대의 이스라엘공동체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아갔던 방식을 추적해서, 우리 신앙에 맞게 재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고, 나도 구약의 하나님 말씀대로 실천해야 하지, 하면 그것은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게 아닌 거죠. 기억하세요,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은 구약성경 말씀으로 하나님을 처형할 근거를 찾았다는 걸요. 성경을 읽는 방법에 대한 훈련 없이 무작정 성경을 읽게 하는 게 오늘날 한국교회가 무너지게 되는 첫 번째 이유였다고 생각해요.

2. 고대 근동 지역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해요. 이스라엘 공동체 근처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고, 어떤 문화, 어떤 사회적 상황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있어야만 구약을 읽을 때, 이스라엘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어떤 신앙 고백들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고대 근동 국가들의 사회에 대한 이해, , , 사람, 자연, 홍수, 전쟁, 죽음, 영혼, 인생, 철학에 대한 이해들을 공부하는 만큼 구약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죠. 오늘 본문 해석을 위해서는 고대 근동의 전쟁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그건 조금 이따 다시 설명해 드릴게요.

3.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 속에서 구약을 읽어야 해요.

기독교 신앙 속에서 율법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설명할게요. 기독교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죠?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유일신 하나님이에요. 그리고 세상에 이미 많은 신이 있다는 전제를 하고 있어요.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구약을 읽을 때 헷갈릴 수밖에 없는 거죠.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을 믿는 것이죠? 거기에 대한 정확한 정리가 없으면 구약을 읽을 때 여러 심판 본문들 때문에 신앙에 대한 기초정리가 흔들릴 수 없어요. 구약의 메시지들은 각각의 맥락 속에서 읽는 방식이 다 다른 본문들이에요.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초정리가 되어있어야만 구약을 바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리공부가 성경공부보다 우선되어야 해요. 성경 구절들을 해석해서 하나님에 대해 정리하는 게 순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차분히 정리한 후에 성경을 읽는 게 기독교적인 순서에요. 그렇지 않고 구약을 읽으면 유대교적으로 읽을 수 있고, 때로는 폭력적인 문자주의자, 근본주의자처럼 성경을 읽을 수 있어요.

 

3. 전쟁에 대한 고대 근동사람들의 생각

이야기의 순서는 2, 고대 근동 사람들의 전쟁에 대한 이해를 생각해보고, 1, 유대인들은 전쟁이란 소재로 어떤 신앙고백을 했는지를 생각해본 후, 3번 다시 기독교 신앙의 눈으로 본문을 정리하는 순서로 가보겠습니다.

고대 근동, 그러니까 이스라엘 근처 국가의 사람들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일단 전쟁은 오늘날 현대의 우리보다는 친숙한 개념일 거에요.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서 뉴스에 나오는 시대는 아니니까요. 삶의 일부이겠지요. 그래서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게 당연한 생각이었을 거에요. 고대 근동의 종교, 그러니까 다신교적 맥락과 전쟁 이야기가 합쳐집니다. 각 국가의 수호신들이 있는데, 인간들의 전쟁은 곧 신들의 전쟁이 되는 거예요. 이집트의 최고신은 태양신 였지요?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싸워서 이기면 태양신 가 이스라엘 민족의 신 야훼를 이긴 거예요. 신이 있다, 없다는 현대적 사유가 아니라, 신은 무조건 있고, 또 많은데, 문제는 어떤 신이 더 힘이 센가에 사람들의 관심이 있는 거예요.

신들의 전쟁이란 개념에 집중했을 때, ‘헤렘이란 개념이 등장해요. 세상의 전쟁은 인간들의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전리품과 포로를 모두 자신들의 신에게 제사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이지요. 곧 완전한 전멸을 시키는 거예요. 종교적인 이유로요. 이것은 성경에 처음 나오는 게 아니라, 고대 근동의 사람 중에 전쟁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이미 생각하고 있던 것이라는 걸 아는 게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철저하게 폭력의 문제를 경험해본 민족입니다. 가장 약자였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역사가 이웃 국가에 폭력을 경험하는 역사에요.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의 권능을 보지만, 사실은 400년간 노예로 살았던 경험이 있는 거지요. 그래서 구약성경의 배경에는 폭력적 힘으로 유린당한 사람들의 아픔이 베이스에 깔려있다고 보면 되어요. 하나님의 전능은 그런 아픔들 위에서 역사하는 능력으로 묘사되고요.

 

Nicolas Poussin (1594~1665), "Pendant to The Victory of Joshua over the Amalekite"

4.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고백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공동체도 비슷한 견해를 그대로 가져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전혀 다른 사유를 할 수는 없었겠지요. 하지만 몇 가지 특징들이 있어요. 신명기 20장에 전쟁을 나갈 때는 이렇게 하라는 내용이 있는데요, 첫째로 나오는 내용이 뭐냐면 먼저 평화를 제안하라는 거에요. 신명기 2010절입니다.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그리고 그들이 거절했을 때에만 전쟁을 해야 하는데, 이때 헤렘 명령이 추가되어요. 어떠한 포로나 가축, 재산을 남기지 말라는 거죠. 사실 신들의 전쟁이라는 걸 말하는 거고요. 이러한 명령은 거꾸로 생각하면 인간적인 목적으로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땅을 넓히기 위해, 더 큰 힘을 갖기 위해, 어떤 인간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쟁하지 말라는 말을 고대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헤렘, 즉 포로를 갖지 말라는 말로 전달 할 수 있는 것이죠.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어쨌든 폭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나, 우리는 맥락을 읽어야 할 것 같아요독특한 점은 반드시 평화를 먼저 말 할것. 이것은 주변의 고대근동국가들의 전쟁에 대한 방침에는 없는 독특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가능한 싸우지 않는 길을 찾는다! 라는 거에요.

한 가지 더 이야기하면, 성경의 전쟁기사는 모두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이루어져요. 인간의 전략, 무기나 힘에 의존하지 않지요. 초자연적 능력, 우박이나 홍수 등의 기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건 무얼 말하는 걸까요? , 바람, 바다, 번개, , 그 모든 것에 각각의 신들이 있다고 믿고 있던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그것들은 한 분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일 뿐 신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전달하게 되지요. 동시에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는 폭력이 전쟁의 핵심이 아니에요. 오직 한 분 야훼 하나님에게만 능력이 있다는 거죠. 그것은 거꾸로, 인간의 무력을 더욱 개발하거나, 응용해서 그런 힘으로 이웃나라를 치지 말라는 말이 되어요. 다시말해서, -자연적 기적으로 구약의 전쟁기사를 설명했다는 건, 자연적인, 인간적인 능력으로 전쟁을 하지 말라는 신앙고백이 된다는 거죠.

그것이 아주 깊이 있게 기록된 내용이 바로 여리고성전투와 아이 성 전투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서 6장에는 여리고 성 전투 이야기가 있어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모세가 죽고 광야에서 40년을 떠돌던 이스라엘 공동체가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거예요. 첫 번째로 만난 장벽이 여리고 성이었어요여리고 성을 어떻게 무너뜨리나요? 언약궤와 제사장들을 앞세워서 공동체가 다 함께 성을 일곱 바퀴 돌아요. 그렇게 무너뜨리는 거예요. “, 이것도 폭력이네요! 이웃 성을 무너뜨렸으니!” 이렇게 말하면,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고백문을 너무 퍽퍽하게 읽어서 그런거에요. 충분한 상상력을 가지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전후 역사와 그들의 야훼신앙관을 가지고 읽으면, 특별히 이 이야기를 그 시대의 주변국 사람들이 읽으면 어떻게 들릴까를 생각하며 읽어보는 거예요. 그럼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는 걸까요? 인간적인 힘으로, 능력으로 전쟁을 하지 않아요.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자라는 말을 하는 본문인 거에요. 여호수아가 능력자가 아니에요. 고대 근동의 유명한 장수들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 거죠.

그리고 헤렘은 어떻게 지켜지나요? 특이하게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들어간 사람들을 도와준 기생 라합, 그녀는 살려주잖아요? 헤렘 자체를 문자적으로 지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율법으로 따지면 몸 파는 기생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어울리지 않죠! 하지만 라 합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편입돼요, 그냥 편입되는 게 아니라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이 되어요. 다윗의 4대 위 할머니가 라 합이거든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의 족보에 등장하는 거예요. 이런 걸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고백 문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게 성경공부인 거죠. 단순히 족보 외우고, 전쟁순서 외우고 이런 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다시 돌아와서, 헤렘, 즉 전멸의 명령은 라합 에게는 해당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이게 다시 중요한 의미로 떠오른 상황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이에요. 여호수아 7장 아이성 전투이지요. 여리고 성 보다 훨씬 작은 성이라 아주 편한 마음으로 갔다가 호되게 당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지? 스스로 반성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이런 메시지를 주었어요여호수아 711, 12절이에요.

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 헤렘, 인간적 욕심으로 전쟁의 포로나 물건을 갖지 말고 제물로 바쳐라!’라는 고대 근동의 주제를 성경이 어떻게 재해석하고 있는지 보이나요? 헤렘을 전쟁포로에 해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의 승리자인 이스라엘 공동체에 까지 확대 적용하고 있어요. 헤렘의 이유를 거룩으로 보고 있고요,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스스로 하나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헤렘이 아니냐, 그런데 그중에 어떤 사람이 전쟁의 포로수확물을 자기 욕심을 위하여 가져갔으니, 거룩이 깨어져 버렸다. 그를 벌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와 함께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결국 제비뽑기라는 신비한? 방법을 통하여 공동체 내부의 범인인 아간을 잡아내어요. 그리고 헤렘을 그에게 적용해서 그의 가족, 재물이 제물로 바쳐지게 됩니다. 물론 이런 처벌조차 폭력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자꾸 현대적 관점에서 본문을 읽으면 그렇게 되는 거고요, 당연한 반응입니다. 거꾸로 그런 민감함 없이, ‘그럼,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니 죽어야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 아내, 아이까지 다 죽는 게 마땅해!’라고 생각하는 건 더 큰 문제에요. 그건 구약을 읽는 법에 대한 훈련이 없이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거죠. 지금 이 본문은 헤렘이라는 고대 근동의 교양을 이스라엘 공동체 스스로 적용하는 독특한 신앙고백이에요. 이 이야기를 읽는 이스라엘 공동체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되겠어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제물, 거룩한 공동체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 거룩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신앙의 중심을 잡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 하나님은 변덕이 있으시니 우리의 무기를 개발하고 힘을 키우자,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이게 구약의 신앙고백이 하는 역할인 거에요. 전쟁이란 소재, 고대인들에게는 일상이고, 중요한 소재를 가지고 야훼신앙을 소개하는 것이죠. , 헤렘을 신앙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개념으로 재해석한 것이 구약의 신앙 고백 방식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전쟁하듯이, 우리는 폭력과 싸워나가는, 폭력에 저항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5. 전쟁하듯이 평화를 갈구하는 삶

이제 말씀을 마무리할게요. 3, 기독교 신앙으로 오늘 본문을 재해석하는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 합니다신약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장면이 있지요? 예루살렘, 곧 평화의 도시에 예수님은 어떻게 들어가나요? 나귀를 타고 들어갑니다. 십자가형이란 물리적 폭력,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를 퍼붓는 정신적 폭력이 난무할 그 공간에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죠.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돌고 점령하는 것은 예수님의 입성 장면의 그림자와 같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의 마음이 좀 더 간접적으로, 구약 적으로 표현된 것은 여리고성 정복 장면이고요,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은 예수님의 입성 장면입니다.

자신에게 올 모든 공격을 알면서도 비폭력적 방법으로 폭력을 없애버리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시작과 끝은 예수님인 거에요. 구약을 읽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함께 많은 배경지식이 필요로 하지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성경은 폭력의 문제를 동화처럼 다루지 않아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처절한 아픔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세상에 당한 폭력을 세밀하게 증언해요.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극복하는 것을 서술함으로 신앙 고백합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폭력을 감내하는 것으로, 그리고 부활의 능력으로 폭력을 극복해내지요

이렇게 구약과 신약을 읽고, 폭력의 문제를 신앙의 눈으로 읽게 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욱 평화에 민감해지게 되는 거예요. 신앙공동체, 하나님의 아들이 겪은 폭력을 성경을 읽음으로 묵상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이지요이 세상에서, 말로, 행동으로, 또는 어떠한 조직적인 구조로, 보이지 않는 시스템으로 폭력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나요? 첫째로는 우리가 먼저 거룩한 사람으로서, 우리 안에 있는 폭력성을 돌아보고, 또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돌아보아야겠지요. 둘째로는 폭력의 문제에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저항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생명을 내던지기는 어렵지요. 저도 부담입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관심과 표현, 공동체적 목소리, 그리고 기도와 토론. 작은 것부터 해보면 어떨까요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처럼, 마치 전쟁하듯이, 우리는 폭력과 싸워나가는,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들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평화의 사람들로 승리하길 바라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글쓴이 김동환 목사는, 길섶교회를 섬기며, 평일에는 초등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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