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작고 초라한 하나님나라의 가치 붙들기
[이택환] 작고 초라한 하나님나라의 가치 붙들기
  • 이택환
  • 승인 2018.11.1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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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마가복음 12:38~13:2

예수님이 평소 헌금에 대해 직접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오늘 말씀이 거의 유일한 본문일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하는가 유심히 살펴보셨습니다. 먼저 여러 부자가 와서 많은 헌금을 합니다. 이어서 가난한 한 과부가 두 렙돈’, 당시 노동자 일당의 약 64분의 일, 우리 돈으로 한 1,000원쯤 되는 동전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부자들이 많은 헌금을 했고 가난한 과부는 적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분명히 부자들이 많이 헌금했고 가난한 과부는 적게 했는데, 예수님은 왜 반대로 말씀하셨을까요? 1990년대 초 동부이촌동에 있는 한 교회가 선교관을 건축할 때, 담임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헌금하실 때에는 힘에 부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헌금을 자발적으로 하게 하면서도, 이보다 최대한 많이 헌금하게 하는 발언이 없는 것 같습니다. “헌금은 힘에 부치게 하는 것이다!” 힘에 부치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1000만 원의 헌금을 내도 전혀 힘에 부치지 않습니다. 반면에 10만 원만 헌금해도 힘에 부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만약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본문의 부자들은 비록 많은 헌금을 했음에도 힘에 부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매우 풍족한 가운데 헌금한 것이기에, 큰돈을 헌금했다고 해도 여전히 돈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는 비록 1000원밖에 안 되는 아주 적은 헌금했지만, 힘에 부쳐 넘치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생활비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자들은 헌금을 적게 하였지만, 가난한 과부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헌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 중에 누구를 칭찬하신 것일까요? 당연히 과부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자신의 모든 돈을 헌금한 과부를 칭찬하셨을까? 그렇다면 부자들도 헌금에 대해 칭찬받으려면, 전 재산을 다 헌금해야 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이 아무리 헌금을 좋아하시기로서니, 설마 신자들의 전 재산을 모두 바치기를 원하실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우주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것을 그토록 탐내시겠습니까? (50:9-13)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헌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헌금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당시 가난한 과부들이 착취당하는 냉혹한 사회-경제적 현실에 대한 예수님의 고발입니다. 40절에서도 예수께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의 죄를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 39절 끝과 40절 앞부분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9.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당시 서기관들은 성경을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말씀 전문가일 뿐 아니라, 기도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한 목소리로, 길게 그리고 아주 능숙하게 기도하는 능력이 있었는데, 과시용 겉치레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말씀과 기도를 따라 살지 않고, 대신 말씀과 기도의 현란한 능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배를 채웠던 것입니다. 심지어 가난하고 불쌍하고 무지한 과부들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과부의 가산을 빼돌리거나 채무에 대한 담보로 저당 잡기까지 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전은 어떠한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전의 내부에는 보물을 쌓아 두는 방이 여럿 있었고, 곳곳에 헌금함이 있었으며, 그 위에 헌금의 목적이 씌어 있어서 사람들에게 다양한 명목으로 헌금을 독려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한 곳도 그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 말씀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헌금한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이라기보다, 불쌍한 과부들의 가산은 물론 쌈짓돈까지 앗아가는 부자 서기관들과 예루살렘 성전 당국의 불의를 질타하신 것입니다그런데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과부를 두둔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일찍이 예수께서 너희 가난한 자여 복이 있나니!”라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을 선언하신 것처럼, 이 말씀은 힘없이 당하고 사는 저 순수하고 가난한 과부를 예수님이 축복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든, 오늘 말씀은 우리가 헌금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할 것인가와 같은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지침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사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평소와는 다른 예수님의 특별한 행동입니다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예수께서 성전 헌금함 앞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는 것인데(카디조 : 정착하다. 자리를 잡고 앉다), 예수님은 거기서 사람들이 헌금을 얼마나 하는가? 자세히 관찰하셨습니다(데오레오 : 식별하다, 관찰하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자리 가운데 굳이 헌금함이 잘 보이는 곳에 예수님이 자리하고 앉으신 것도 그렇고, 게다가 민망하게도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예수님이 자세히 하나하나 관찰하셨다니 말입니다.

오늘 헌금함 앞에서 보인 예수님의 이 특이한 행동 역시,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종 특이한 행동을 했습니다. 에스겔은 머리카락을 잘라 1/3은 불사르고, 1/3은 칼로 베고, 1/3은 바람에 날려버렸지요. 예레미야는 돈을 주고 산 멀쩡한 옹기그릇을 많은 사람 앞에서 깨뜨렸습니다. 누군가 이런 행동을 하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에게는 이런 행위가 다 특별한 의미를 지닌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예수님도 제철 아닌 무화과나무의 열매 없음을 저주하신 적이 있으시고, 성전에서 사람들을 내쫓기도 하셨지요. 마찬가지로 오늘 헌금함 앞에서 보인 예수님의 이 특이한 행동 역시,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무언가 중요한 뜻이 있다는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은 곧바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다시 43~44절입니다.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 괴팍스러운 행위를 통해 제자들에게 가르시고자 하신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세상은 크고 화려한, 그러나 불의한 것이 득세합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은 의롭고 순수해도 무가치해 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에 앉는 사악한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삼킴. 당하는 비천한, 그러나 순수한 과부가 대비됩니다. 성전 안에서는 불의한 부자들이 낸 많은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적은 두 렙돈이 비교됩니다. 그리고 131절에서는 저 아름답고 화려한, 그러나 불의한 성전과 장차 의롭고 새로운 성전이 되실 그러나 지금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예수님이 대비됩니다.

이제 며칠 후면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보잘것없는 두 렙돈처럼, 세상의 무관심과 조소 가운데, 낮고 천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이 모든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더 많이 드려진 것이라는 이 역설적인 이야기를 통해,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당시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부자 서기관들은, 초라한 두 렙돈처럼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그토록 감탄했던 저 크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 또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불타서 무너졌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헌금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본문과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이긴 하지만,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는 물론 헌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세상의 공동체에는 헌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실 때, 제자들 가운데 헌금 관리자를 두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헌금이 필요합니다. 현대의 헌금은 구약시대 세금과 같은 십일조 또는 성전세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신약시대 이후의 성도들은 예수께서 머리 되신 교회에 자발적으로 헌금합니다. 물론 교회가 아닌 곳에 하는 헌금도 있습니다. 모든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고, 또 자신이 속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헌금은 그 공동체가 건강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일정 부분 책임지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헌금이 자발적이긴 하지만, 구약시대 십일조와 같이 소득의 1/10을 교회를 포함해,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헌금하는 것은 여전히 적절한 가이드라인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기관도 헌금을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헌금은 모든 면에서 투명하게 공개되고 잘 관리되어야 합니다. 지난주 토요일에 정책운영위원회가 있었는데, 올해 우리 교회는 대략 재정의 55%가 인건비였습니다. 예산 자체가 작은 소형교회는 인건비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만약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어린이부, 청소년부 사역자를 두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비용으로 각종 교육 장비를 사들이면 어린이부, 청소년부가 잘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양 전도사님 없는 어린이부, 최 전도사님 없는 청소년부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인건비는 단지 인건비가 아니라 사실 교육비입니다. 청소년부는 매 주일 예배 후, 전도사님과 함께 밖에 나가 점심을 먹습니다. 그것도 단지 먹고 마시는 비용이 아니라 교육비입니다. 지난 5~6년간 청소년들이 그렇게 먹고 마셨기에 이 작은 교회에 청년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교회 전도사님들은 신학생이 아닌 신대원을 이미 졸업하신 분들입니다. 큰 교회도 이런 경우가 드뭅니다. 더욱 사례해도 모자랍니다. 또 특별히 우리 교회를 사랑해서 미국에서 신촌까지 스스로 찾아오신 박 목사님을 통해, 새해에는 우리가 캠퍼스 선교 후원에 대한 작은 소망을 키웠으면 합니다. 이게 다 단지 인건비가 아닌 사람을 키우는 교육비입니다.

우리 교회는 임차료 비중이 약 12%인데, 거기엔 모 기독교 단체를 후원하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월세가 일종의 사회선교비입니다. 또 기존에 후원하는 마더하우스 여성 노숙자 사역(대표-최 집사님)과 일본 가고시마의 정-신 선교사님을 돕는 일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한편 교회가 상식을 잃어가는 시대에,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를 후원하는 것 역시 중요한 사회선교입니다. 당장은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 해도, 때가 되면 해야 하는데, 역시 헌금이 필요합니다. 11/25일 조별모임 시간에 정책운영위원회 자료를 검토해 보시고, 치열하게 토론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계속 든든히 세워져 나갈 수 있도록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헌금에 관한 지침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크고 화려하고 힘 있는 것 앞에서 늘 유혹받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세상에서 외면당하기 쉬운 작고 초라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늘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비록 세상 속에서 아직은 너무나 작고, 미약하고 무력하게 보여,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그 위대한 승리와 그 비할 수 없는 영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미 완벽하게 이루셨음을 오늘도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2018. 11.11, 성령강림주일 후 스물다섯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교회력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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