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침투 중'인 우리를 환대해준 팔레스타인 사람들
'가정 침투 중'인 우리를 환대해준 팔레스타인 사람들
  • 조미선
  • 승인 2018.07.0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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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았던, 고마웠던 그리고 한없이 미안했다
ⓒ조미선

제주 예멘 난민 무슬림에게 쏟아지는 우리국민의, 특히 기독인이 뿜어내는 수준이하 발언이 안타깝기만 하다나는 오래 전에, 호주에서 ‘New Tribes Mission’에서 진행한 선교훈련을 받았다. 그 후 선교지로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해 빚진 마음이 있었다. 그 마음 때문에 교회나 선교단체를 통해 거의 매년 단기선교로나마 선교지 땅을 밟았다중년의 나이, 일을 하고 있으면서 세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일정기간 훈련을 받고 단기선교를 떠나기까지 시간, 재정, 체력, 연약함과의 치열한 전쟁을 치루었다. 그렇지만 가지 않고서는 베기지 못하는 선교지에 대한 가슴뜀은 늘 힘듬을 이겨내고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 주로 다니던 교회와 관련 있는 선교사님 사역지로 갔다.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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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I 단체를 통해 단기선교를 가기도 했다. I 단체는, 공격적 선교방식 때문에 교계에선 문제를 삼았지만 I 단체의 역동적인 선교방식과 이슬람권 선교는 내게는 신선한 도전이었다다니던 교회도 I 단체에 대해 열려 있었다12주간의 비전스쿨을 마치고 나면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갈수 있는 담대함이 생겼다. 2010년 여름, 나는 어린이 비전스쿨팀 교사로, 둘째딸은 청소년 팀원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선교팀에 합류했다.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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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한 명당 전국에서 모인 초1~6학년 남녀 8~10명이 조원으로 배정 되었다. 선교일정 중 '가정 침투'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침판과 지도, 얼마간의 여비가 주어졌다. 다함께 단체버스를 타고 가다가 마을이 보이면 한 조씩 내려준다. 그러면 내린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 숙식을 하고 다음날 지도에 적힌 장소로 찾아오는 미션 이었다우리 조는 예루살렘에서 지리적으로는 멀지 않은 팔레스타인의 라말라 시의 어느 마을에 떨어뜨려졌다. 버스에서 내렸다. 어디로 가야하나 막막해 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원 한 아이가 큰소리로 기도했다. "주님, 이 마을에서 젤로 부잣집으로 우리 가게해 주세요!" 아이들은 큰 소리로 "아멘'을 외쳤다.

뜨거운 뙤약볕아래 30분을 걸었을까? 더 이상 못 걷겠다고 생각 했을 때 팔레스타인 아이들 한 무리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 아이들은 가방에서 풍선을 꺼내 풍선아트를 시작했다. 풍선 모자를 만들어 여자아이에게 씌워주었다. ~ 하고 아이들이 더 몰려왔다이번엔 가방에서 복음 팔찌를 꺼내어 들었다. 알아듣든지 말든지 아이들은 배운 대로 한국말로 복음을 전했다. 조금 있으니, 어른들이 모여 들었다. 어른들은 아이들과 다르게 경계심이 있었다. 내가 영어를 하는 것을 알자 질문이 쏟아졌다어디서 왔느냐?’, ‘뭐하는 사람들이냐?’ ‘여기 전쟁 중인 것은 알고 있느냐?’, ‘위험한곳을 당신은 왜 이 아이들을 데리고 왔느냐?’, ‘이 아이들이 다 네 자식이냐?’, ‘빨리 이곳을 벗어나라!’ .

하지만 그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어떻게, , 우리가 이 먼 곳까지 왔는데.. 내가 말했다. ‘우리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왔다. 나는 학교 영어 선생님이고 이 아이들은 나의 반 학생들이다.’ 그러자, ‘몇 학년 이냐?’고 묻는다.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섞어있으니.. ..) 4학년이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 현장 답사 여행 중이다. 문화체험을 하러 이곳에 왔다. 팔레스타인 라말라가 아름답고, 사람들도 친절하다고 해서 왔다. 혹시 하룻밤 재워줄 수 있다면 이 아름다운 곳에서 당신나라와 당신들에 대해 알고 싶다.”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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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창한 거짓말을 믿은 순진한 사람들은, 고개를 끄떡이며 미소 지었다. 자기들끼리 한참을 의논 하더니 우리를 한 집으로 데려갔다. 아이의 기도대로 그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잣집이었다. 집주인은 미국에 사업체가 있고, 라말라에 만도 집 두 채가 있단다. 아이들이 팔레스타인 문화와 언어를 잊지 않도록 방학은 꼭 팔레스타인에서 지낸다고 했다.

안주인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음식을 내놓았다. 마을사람들은 간식을 싸들고 저녁에 놀러 왔다. 아이들을 모두 씻길 수 있게 해주고 가장 넓은 방에 새 침구를 넣어주었다. 밤에 잠시 집주인 가족이 장을 보러 나갔다. 나는 때는 이때다 싶어 나는 아이들을 거실에 모아놓고 예배를 드렸다. 아이들은 마음씨 좋은 이 가족이 알라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어 천국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집 밖으로 나가 집 주위를 돌며 땅 밟기 기도도 했다.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조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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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동네 아이들이 몰려왔다. 신나게 놀고 아침 점심을 거하게 얻어먹고 선물까지 챙겨들고 우리는 마을을 떠났다. 주인아저씨는 밴을 빌려 우리를 목적지인 베들레헴 행 버스터미널까지 운전해 데려다주셨다. 안전을 신신 당부하면서 여행하다가 혹시라도 어려운 일 만나면 무조건 전화하라고 자신의 연락처를 써 주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 아이가 말했다.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네요. 무슬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네요. 아니 우리보다 더 좋은사람들인 것 같아요우리는 거짓말 했는데... 이 사람들은 진심으로 우리를 대해줬어요" 그 아이의 말에 찔림과 죄책감이 들었지만 애써 밀어내고 말했다. "괜찮아. 복음을 위한, 주님을 위한 거짓말이니까 괜찮은 거야.."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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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에 도착하니 타 지역에 들어간 조원들도 모두다 지역주민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며 그 내용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역에서의 가정침투는 거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우리 팀도 실패했다. 우리는 지중해변의 텔아비브 공원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냈다.

그렇게 3주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핸드폰으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놀랍게도 팔레스타인 집주인 이었다. 의례적으로 나의 핸드폰 번호를 주고 왔는데 정말로 전화를 한 것이었다. 너희나라로 잘 돌아갔는지 우리가족과 마을사람 모두 너희를 걱정하고 있다고, 아이들 모두 건강하냐고, 모두가 위험하다고 꺼리는 팔레스타인에 찾아와주고 아름다운 곳 이라고 말해줘서 고맙다고 ... 언제든 다시 찾아오라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고맙고 미안함에 눈물이 났다. 그 후로도 가끔 연락이 온다. ‘네 학생들 잘 있느냐? 지금은 몇 살이 되었냐? 보고 싶다.“ 그 물음에 나는 어물쩍 대답을 피한다. ? 나도 모르니까.. 귀국 후 공항에서 아이들과 헤어졌고. 그 후 연락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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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우리가 팔레스타인의 라말라에서 만난 그들은 모른다. 2010년 무더운 여름, 8명의 아이들과 내가 왜 자기들 마을에 나타났는지, 그곳에서, 당신 집에서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 그 후 8년이 지났다. 성인이 된 아이들은 제주도 예멘 난민 소식을 접했겠지? 혹시 나처럼 이 사람들로 인해 그때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참 좋았던, 고마웠던 그리고 한없이 미안했던 기억으로 ...

1년 전 나는 36년간의 보수교회 성도생활을 청산하고 교회를 옮겼다. 새롭게 옮긴 교회에서 처음으로 들었다. 내 종교가 존중 받기를 원한다면 다른 이의 종교도 존중해 주라는 설교를... 내 종교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 너그러울 수 있다는 설교를 말이다. 이제라도 그것을 알아 다행인거겠지... 부디, 제주 예멘 난민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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